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다올 Oct 22. 2024

03 무지렁이로 살다

   무지렁이로 살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영수는 형 책가방 속이 궁금했다. 하루는 승찬이가 놀러 간 사이에 형 가방을 열어서 연필과 크레파스를 꺼내놓고 책꽂이에서 공책과 책도 한 권씩 꺼냈다. 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강아지가 뛰노는 그림과 청군과 백군이 응원하는 가을 운동회와 아이들이 소풍 가는 그림에 눈길이 갔다.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운동회날 청군과 백군 띠를 이마에 두르고 달리는 아이들도 그리고 선생님 손잡고 소풍 가는 그림도 그렸다. 영수는 그림을 그리는데 정신이 팔려 형이 돌아온 줄도 몰랐다. 승찬이가 방문을 열고, 방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는 입이 떡 벌어진 채 잠시 말을 잊었다가 소리를 질렀다.

   “야! 니, 시방 내 공책에 뭐 하고 있노! 이 빙신아! 와, 내 공책에 그림을 그리노!”

   승찬이는 마당에서 머슴 승이와 소여물을 썰고 있던 아배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부지! 잔갑이가 내 가방 열어가꼬, 공책에다 막 낙서를 했어예!”

   “뭐? 뭐시라꼬! 이 빌어묵을 손이!”

   “아부지! 한 번 가 보이소, 난리도 아입니더.”

   성질 급한 아배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눈을 부릅뜨고 씩씩거리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배는 영수 뒷덜미를 잡고 손바닥으로 인정사정없이 뺨따귀를 패대기쳤다.

   “이넘의 손! 나가 디지거라! 아무짝에도 씰데 없는 손!”

   아배는 직성이 풀리지 않자, 다시 “이넘의 손! 나가 디지거라!”하고 고함을 지르며 영수 등짝을 거친 손으로 후려치듯이 두드려 팼다.

   겨우 여덟 살인 영수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지고 뺨에 커다란 손자국 표시가 하얀 종이 위에 빨간 낙인이 찍힌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배의 고함에다 뺨과 등짝을 두들겨 맞은 아이는 뇌성마비 환자처럼 몸을 마구 비틀면서 팔을 비비꼬고, 눈을 파르르 떨면서 턱마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이는 공포에 휩싸여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울려고 해도 목구멍에서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봉창 문을 열고 이 광경을 보던 할매가 소리를 지르며 헐레벌떡 맨발로 안채로 들어왔다.

   “야야! 와 그래 샀노! 어린 기, 무신 잘못이 있다고 이래 난리를 부리노!” 할매가 급히 들어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할매 목소리를 듣고서야 영수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턱은 틱 환자처럼 반사적으로 돌아가고, 숨을 허어억 허어억 가쁘게 몰아쉬며 쉴새 없이 딸꾹질을 했다.

   “어엉 어엉, 딸꾹······. 어엉 어엉, 딸꾹 ······.”  

   아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헌 헌 헌 공책이다, 아이가! 헌 공 공 공책에 그 그 그림 그리는 는 는 데······.”

   “야야! 이웃 부끄럽다. 넘들이 보믄 쑹 보겠다. 고마해라!”

   할매가 말리고 야단치자 아배는 슬그머니 뒤란으로 나가고, 어린 영수는 그 자리에 선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느새 승찬이도 사라졌다.

   할매는 울고 있는 손자를 보듬어 안은 채 “아이고 내 새끼!“하며, 간장이 쥐어짜이듯 꼬이고 뒤틀리는 아픔을 느끼면서 아이 손을 잡았다. 손자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할배는 집안에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도 내다보기는커녕, 사랑방에 고자세로 앉아 샌님처럼 ‘에헴’하고 기침만 했다.

   어메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영수를 쳐다보다 시에미가 아들을 달래기 시작하자, 그제야 눈치 없이 영수를 나무랐다.

   “말라꼬, 생이 가방 열어보노? 글도 모리면서······.”

   아이가 서럽게 울면서 어메에게 대들었다.

   “생이 지 지는 핵 핵 핵교도 보 보 보내주고! 가 가방도 좋은 거 사 사주고! 연 연필도 사 사주고! 지 지 지우개도 있다 아 아이가!”

   영수는 울먹이며 말할 때마다 더듬거리며 딸꾹질을 계속했다.

   “내는 핵 핵교도 못 못 댕 댕기구로 하고! 가 가방도 안 사 사주고! 연 연필도 와 안 사 사주노! 와! 내는 일 일만 시키고, 심 심부름만 시키노!”

   어린 영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도 핵 핵교 댕 댕기고 싶다! 내도 가 가방 가 가지고 싶다! 공 공책 사도고, 연 연필도 사도고! 크 크 크레용도 갖고 싶다! 와, 내는 안 안 사주노! 내도 핵 핵교 보 보내도고!”

   그동안 어린 영수는 형이 가방을 둘러메고 대문을 나설 때마다, 문간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채 손가락만 빨았다.

   눈치 없는 어메도 말문이 막혔다. 어린 것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으면 저리 말을 할까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코를 팽 풀면서 울먹이는 소리로, “이넘어 손아! 내보고 우짜라꼬?”라고 말하면서 부엌으로 사라졌다.

   이를 지켜보던 할매가 “아이고! 조상님, 천지 신령님! 이기 무신 일인 기요! 우짜든지 굽어살피 주이소! 우짜든지 내 새끼, 가슴에 한이 안 맺히도록 도와주이소!”하고 영수를 얼싸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는 방에 들어와 애써 만든 방패연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어린 영수의 가슴에 반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형 승찬이를 편애하고 자기를 구박하는 건 아는 나이였다. 아이는 서러움이 복받쳐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무르팍에 파묻고 소리 내어 울었다. 눈물이 두 빰을 타고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할매가 방에 들어와 손자를 부둥켜안았다.

   “잔갑아! 이 할미가 있다 아이가. 울지마라. 할미가 잘못했다, 아이고 내새끼!”

   할매도 눈물을 머금고 목이 메어 할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그날 밤 아배는 아내 눈치를 살피면서 서랍 빼닫이를 열어 뭔가를 찾고 있었다. 이를 본 어메가 남편에게 원망을 퍼붓듯이 말했다.

   “와! 아들을 개 패듯이 팰 때는 언제고, 인자 와서 마음에 캥키는 기요? 잘한다 아입니꺼! 지발 성질 좀 죽이소!”

   아배는 안티푸라민 연고를 들고 슬금슬금 아들 방으로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수가 그림을 그렸던 공책은 영찬이가 1학년 때 쓰다가 내팽개친 거였고, 책도 1학년 국어책이었다. 지금 영찬이는 3학년이다. 다음 날 아침, 영수 얼굴에는 손자국처럼 생긴 시퍼린 멍자국이 생겼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밤에 관광서 사람들이 봉현마을에 들이닥쳤다. 트럭을 마을 입구에 세워 놓고 밀주 단속을 나왔다. 술독이 발각되면 밀주 단속 조사원들은 나라에서 금하고 있는 밀주를 담았다고 술독을 모두 트럭에 싣고 갔다.

   그 시절엔 먹을 쌀이 부족해 자급자족이 어려웠던 때라 정부에서 농주를 가정에서 담는 걸 금지시켰다. 봉현마을에서는 “술 추로 왔다.”라고 하는 말이 밀주 단속하러 나왔다는 은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소문을 듣고 아배는 얼른 영수를 불러 “술 추는 관광서 사람들이 오나 잘 바라”고 하고, 승이와 함께 술독을 들고 허겁지겁 대밭으로 옮겼다.

   단속 조사원들이 하동장댁에 들이닥쳤다. 술 익은 냄새는 나는데 집안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술독을 찾지 못했다. 뭔가 수상쩍은 낌새를 차렸는지 조사원이 영수에게 물었다.

   “너거 집, 술독 어데 숨깄노?”

   “모르는데예.”

   “술 냄새가 나는데 모른다꼬! 어데 숨긴노?”

   “지는 몰라예!”

   순진한 아이 영수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배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참아왔던 아배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응어리가 목구멍으로 솟구쳐올라, 어린 영수는 조사원들에게 술독이 어디 있는지 일러주고 싶었다. 아배가 관공서 조사원들에게 절절매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 응어리가 터져서 목구멍을 타고 막 입 밖으로 나오려던 찰나에 할매 목소리가 들렸다. 할매 얼굴 보고 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울분 응어리가 쑥 내려갔다. 영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마터면 술을 빼앗길 뻔했다.

   할매가 조사원들에게 목청을 높여 야단을 쳤다.

   “와, 어린 아한테 그라는교. 모른다카믄 없는기라!”

   할매가 면박을 주자 책임자 격인 조사원이 머쓱하여 머리를 긁적이며 다른 조사원들에게 딴 집으로 가보자고 했다.     

   새봄이 찾아오고 영수에게 국민학교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할배와 아배는 영수를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입학 통지서가 나와도 그들은 무관심했다. 아이들이 학교 입학하는 걸 영수가 어메에게 울면서 매달렸다.

   “엄마! 내도, 핵교 댕기고 싶다! 가방 메고, 동무들하고 핵교에 가고 싶다! 내도 핵교 보내 도고!”  

   손자가 어미에게 떼를 쓰면서 우는 걸 본 할매가 아배와 할배에게 영수도 국민학교 보내자고 설득했다.

   “장남만 공부시키믄 됐지! 장남이 잘 되믄 집안이 다 일어나는데 말라꼬 차남을 공부시키노! 공부해서 어데 씰 데가 있다꼬!”

   아배는 자기 아버지인 하동장 할배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던 말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할배도 이런 아배를 나무라지도 않고 그저 수수방관했다.

   밤마다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를 훌쩍거리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지난해엔 영수 동무들이 모두 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자기 혼자만 입학하지 못했다.

   그때 할매가 “잔갑아! 국민핵교 들어갈라 카면, 입학 통지서라고 카는기 있는데. 잔갑이 니는 호적이 일 년 늦게 올라가서 명년에 통지서 받아볼끼다.”라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가 아무리 할매와 어메에게 매달려도 소용이 없었다.

   할매가 작은 손자도 국민학교 보내서 까막눈이라도 면하게 해주자고 영감에게 말하고 아배에게도 여러 번 이야기해보았지만, 황소고집 부자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매요! 장남만 공부시키믄 집안이 다 일어난다 안 카요!”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할매가 아들인 아배를 재차 설득 했다.

   “애비야! 작은 손자도 핵교 보내자. 까막눈이라도 면해주야 안되겠나!”

   “어매는 인자 그런 소리 하지 마소! 안 된다 카믄 안 되는 기라! 장남만 공부시키면 됐제. 아부지가 ‘장남이 잘 되면 집안 다 일어난다’ 카는 말 못 들었는기요?”

   아배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일언지하에 제 어미 말을 묵살하였다.

   저녁을 먹고 할배에게도 “영감, 작은 손자 까막눈이라도 면해 주는 기 어떻소?”하고 하소연했다.

   할배는 일언반구 대꾸도 하지 않고 바깥마당으로 나가버렸다.

   할배와 아배는 요지부동이었다. 되돌아온 두 사람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장손 승찬이와 막내 영철이 백일과 돌 때는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치렀는데, 영수는 할배와 아배의 냉대 속에서 백일잔치와 돌잔치는 물론, 국민학교 입학마저 할배와 아배의 무관심으로 묵살되었다. 영수는 국민학교 문턱은커녕 한글도 배우지 못한 채, 일자 무식꾼이 되어갔다.     

   어린 영수의 마음은 할배와 아배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심술이 났다. 가게 심부름을 시키면 밖에서 한참 농땡이를 부리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할배와 아배가 “머한다꼬 와 이래 늦게 오노!”하고 야단을 치고 구박하면, 아이가 “점방 문이 닫히갔고, 주인이 없었습니더. 점방 주인 기다리다가 사왔읍니더.”하고 거짓말을 했다.

   아이는 잔꾀를 부리며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할배와 아배를 골탕 먹이고 싶었고, 그 두 사람이 시키는 일은 어떻게서든 꽁무니를 빼고 싶었다. 아침을 먹고 소풀을 베러 망태를 둘러메고 밭 언덕으로 가서 망태를 가득 채우고, 아이는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봉현 들판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 일쑤였다.

   오후에 개구리를 잡으러 깡통과 대나무 채를 들고 가서도 개구리를 한 깡통 가득 채우고 나서 동무들과 놀거나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고 놀다가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배가 영수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이넘의 손! 머 한다꼬 이래 늦게 오노! 빨리 다니거라! 심부름이 밀맀다!”

   아이는 “예”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아배가 하는 말을 한쪽 귀로 흘러들었다.


   이듬해 봄에 여동생 경희가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여자는 시집가면 남이라고 아무 쓸모가 없다던 할배도 경희가 입학하자 그저 수수방관했다.

   ‘지집아는 시집가믄 시마인기라. 망구 씰 데가 어딘노!‘라고 말하던 아배도 염치없이 외동딸을 앞장서서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경희는 어릴 때부터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은 아이라 할배와 아배가 무척 귀여워했다. 비록 머리는 기르지 않아 단발에 남자처럼 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선머슴아였지만, 머리가 영리하고 애교가 철철 넘쳤다. 집안 식구 중에 경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희는 국민학교 6학년인 큰 오빠 승찬이와 아침마다 할배와 할매, 아배와 어메에게 재롱을 떨면서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할배도 그런 손녀가 대견스러운 듯 “오냐 오냐, 잘 댕기오너라.”하고 재롱을 받아 주었다. 아배도 안채 마당에서 장남과 함께 학교에 가는 딸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영수는 동생들이 학교 갈 때마다 방문을 빼꼼히 열고 문틈 사이로 지켜보았다. 처음엔 그저 부러움에 눈만 꺼벅꺼벅하며 지켜보다가, 언제부턴가 가슴 속에 응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영수는 승찬이 형도, 여동생 경희도 국민학교에 다니는데 자기만 학교에도 못 다니고 죽으라고 심부름하고 일만 하는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의 부러움은 서서히 질투와 열등감으로 바뀌었다.

   하동장 장손 승찬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는 4년제 학교로 졸업하면 곧바로 전문학교로 진학할 수 있고, 중학교만 졸업해도 국민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응시해서 선생이 될 수도 있었다.

   승찬이는 부산에서 하숙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하숙비와 학비가 수월찮게 들어가지만, 할배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논마지기가 봉림면 내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농인지라 객지에서 장손 공부시키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막내 동생 영철이도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새로 산 옷과 신발과 가방을 자랑하며 영수 애간장을 태웠다. 영수는 호기심에 영철이 새 옷을 몰래 입어보려고 어깨에 걸치고 옷소매에 팔을 집어넣었다. 옷이 작아서 팔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자, 힘을 주어 소매를 당기다가 소매 단추가 떨어졌다. 영수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철이가 방에 들어와 보니 작은형이 자기 옷을 팔에 걸치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엄마! 작은 생이가 내 옷 다 베리 났다! 단추도 떨어지고 소매도 쪼매 째짔다! 퍼뜩 와바라, 엄마!”

   어메가 급히 부엌에서 안방으로 달려왔다. 그때까지 소매에서 팔을 못 빼고 있던 영수를 본 어메는 어이가 없어 쳐다보다가 한마디 했다.

   “동상 옷을 말라꼬 입어 보노! 니 옷 입으믄 될낀데, 와 동상 옷을 입어보고 그라노?”라고 말하면서 영수 팔 소매를 벗겼다.

   “영철아! 괘안타! 단추는 엄마가 새로 달아주께. 영수 생이는 엄마가 혼구녕을 내났다!”

   아배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영수는 틀림없이 욕설에다 거친 손바닥으로 귀싸대기를 얻어맞고 등짝도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영수는 영철이가 도회지 아이처럼 뽀얗고 잘생긴 동생이라 자랑스럽고 부럽기도 하지만, 이간질할 때는 정말 미웠다.

   “할배! 영수 생이, 오늘 놀아습니더. 생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내가 심부름 다 했다 아입니꺼!” 영철이는 없는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아배에게 “영수 생이가, 심부름을 가라 캐가지고 숙제도 못했십니더.”하며, 교활하게 거짓말까지 지어서 형을 골탕 먹였다.

   하지만 영수는 동생이라 귀엽다고 봐주었다. 영수가 어수룩하게 굴면 굴수록 영철이는 더욱 간교하게 이간질을 하고, 거짓말을 참말처럼 지어내어서 그를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저녁에 군불을 때고 영수가 방에 들어가 자려고 이불을 폈다. 영철이가 자기는 지금 숙제해야 하는데, 옆에서 코를 골면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저리 가라고 형을 구박했다.

   아배에게 “영수 생이가 숙제도 못하구로 자꾸 찝쩍거립니더.”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고자질까지 했다.

   아배가 벌컥 화를 내며 “이넘의 손, 여 와서 자고 동상 괴롭힐지 말거라!”하고 영철이 편을 들어주었다.

   영철이마저 학교에 다니게 되자, 영수 가슴에는 알게 모르게 아배와 할배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쌓여갔다. 십대인 영수는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아배가 잔소리를 하고 욕설을 마구 해대도 영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 들판 지평선을 바라보며 온갖 공상을 하며 지내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다.

   영수가 그럴 때마다 아배는 죽일 듯이 고함을 지르고 행패를 부렸다. 아배의 패악질이 극에 달하자 할매가 나섰다.

   “아비야! 와 니는 아들을 그래 교육시키노? 좋은 말로 타이르도록 해라.”

   “어매가 그래 이 넘의 손을 감싸니께, 지 애비 말을 안 듣는 거 아닌기요?”

   “야가 무씬 소리를 그래 하노! 애미가 바른 소리해도 귀에 안 들어오나?”

   “에이, 빌어묵을!” 애비는 바깥마당으로 나가면서 쌍소리를 했다.     

   입춘이 지나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오늘은 봉래면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어메는 엊저녁답에 텃밭에서 키운 토마토와 오이, 웃등 밭 언덕에서 머구잎과 채소를 따서 광주리에 담아 놓고, 아침에 계란도 바구니에 담아서 장에 갈 채비를 마쳤다.

   아침부터 아배는 마당에서 “해가 중천에 떴는데 언제 장에 갈끼고!”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어메와 영수는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질질 끌면서 집을 나섰다. 영수는 지난가을에 장만한 리어카에 채소와 계란을 가득 싣고 장터로 가다가 동네 어른을 만났다.

   “장에 다녀오십니껴!” 영수가 인사를 했다.

   “갈치다! 갈치! 헐터라! 헐어!”

   대답이 걸작이다. 동네 어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혼잣말을 남기고선, 한 손엔 지푸라기로 묶은 갈치 몇 마리를 들고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걸어갔다.

   장에 갔다 온다는 대답은 은연중에 용인된 묵시적인 약속으로 갈음하고, ‘장에 가니까 갈치가 싸더라, 그러니까 너도 갈치를 사라’는 함의를 행간에 담은 말이렸다. 말의 행간을 읽지 못하면 뜬구름 같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다.  

   영수는 장터 입구 난전에 리어카를 댔다. 난전은 장터와 곰보 다리 개천을 사이에 두고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데, 목이 좋은 곳엔 할머니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잔갑아, 여다가 좌판 깔자. 채소하고 모두 꺼내 바라.”

   영수는 난전 한쪽 귀퉁이에 가져온 채소를 풀었다. 어메는 새끼줄로 엮은 맷방석에 앉아 손님과 흥정을 하며 장사를 시작했다.

   “가지 얼만기요? 상추는요?”

   청바지를 입고 제법 멀끔하게 생긴 젊은 아낙이 더 달라고 우겼다.

   “아이고, 아지매! 그래 마이 가지 가면 남는 거 없습니더. 그라마 내 토마토 하나 더 인심쓰께요.”

   어메도 5일장 아낙들 욕심을 훤히 꿰뚫고 있는지라, 그네들이 물건값을 흥정하고 깎으려고 하면 에누리로 토마토나 가지를 얹어주기도 했다. 이런 게 시골 장터 인심이다.

   옆에서 나물을 팔고 있던 할머니는 한 움큼 덤을 주기도 했다. 할머니의 손은 거친 골이 패고 손톱은 닳아서 몽당연필처럼 보였다. 그래도 현찰을 받고 앞치마 주머니에 넣을 땐 얼굴에 합죽이 웃음꽃이 피었다.

   “퉤, 퉤! 오늘 마수걸이했네.” 지금 막 장사를 시작한 또 다른 할머니가 돈을 앞치마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어메는 오늘 장사한 돈을 몸뻬 속주머니에 집어넣고 장을 둘러보러 나섰다. 과일가게에서 어린아이 머리통만 배와 새색시 연지곤지처럼 불그스레한 사과를 몇 개 사서 영수가 둘러맨 망태에 집어넣었다.

   생선가게 주인이 “칼치가 세 마리 오천 원! 떨이요, 떨이!”하고 손뼉을 치면서 발을 굴렀다. 어메는 때깔 좋은 도미와 조기를 고르고, 오늘 저녁 반찬거리로 갈치도 대여섯 마리 샀다.

   신발가게 앞에서 어메가 멈춰 섰다. 어메가 영수한테 파란 운동화를 한번 신어 보라고 하자 영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녀는 계산을 하고 옆의 옷 가게에서 꽃무늬 몸뻬를 하나 들고 이리저리 재보고 개중에서 코스모스꽃이 핀 몸뻬 두 개를 장바구니에 집어넣고 셈을 치렀다. 오늘 장은 다 본 셈이다. 시장 본 물건을 담은 망태가 제법 묵직해졌다.

   장터를 나오는 길에 동동 구라분 장수 장돌뱅이가 구성진 가락으로 하모니카를 불면서 발을 내디디며 둥둥하고 북을 치고, 개구쟁이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5일장의 시끌벅적한 좌판과 고달픈 농부들의 삶과 경상도 사투리를 뒤로 하고 면사무소에 볼일 보러 들렀다. 호적초본 한 통 떼는 데도 면서기와 안면이 익어야 빨리 사무가 이루어졌다. 서기는 언제 초본을 떼 줄라나 목 빠지게 기다리다 한 시간여 만에 초본을 받았다. 영수는 호적초본을 둘둘 말아서 윗주머니에 넣고 면사무소 마당에 대어놓았던 리어카를 끌고 어메 뒤를 따랐다.

   신작로는 오늘 시장 본 물건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수가 리어카를 끌고 가는 데 저만치 중학교 교복을 입은 봉현마을 동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영수가 갑자기 천천히 걸어가자, 어메가 “와 그라노? 발이 아푸나?”하고 물었다.

   성구가 영수를 보고 아는 척했다.

   “영수야! 장에 갔다 오나?”

   “어, 어!”

   영수는 성구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바삐 어메 뒤를 쫓아갔다.

   동무들이 뒤따라오면서 학교 이야기를 했다. 영수는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며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엿들었다,

   “성구야! 니, 오늘 수학 시간에 문제 잘 풀던데! 공부 마이 핸나 보네?” 동수가 물었다.

   “아이다. 그냥, 내가 아는 거라서 손 들고 나가서 풀었다 아이가!”

   “와! 니 평소 실력이다 이말이가? 그라믄 2학기 시험은 이라뿟겠네!” 동수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야! 와 그라노? 내사 수학 샘이 좋아서 수학 공부 열심히 한다 아이가! 내는 수학 시간이 제일 재미있더라. 너거는 재미없나?” 성구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맞다! 수학 샘이 제일 아이가! 우리 핵교 인기짱이 수학 샘인 거 모리는 넘이 있나?”하고 수다를 떨며 영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영수는 고무신을 신고 리어카를 끌고 가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교복을 입은 동무들과 비교되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속으로 ‘에라, 모르겠다’하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마음만 조급해졌지 정작 시장 본 물건이 가득 실린 리어카는 마음먹은 대로 끌려오지 않았다.

   ‘씨발! 해필 고무신 신고 장에 갔다 오는데, 쪽팔리구로 새끼들이 아는 체를 다 하노! 와? 내 뒤를 졸졸 따라 오믄서 핵교 이바구는 하노!’

   영수는 속으로 동무들 욕을 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드디어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동무들은 뿔뿔이 자기네 집으로 갔다. 리어카를 끌고 하동장댁 바깥마당에 들어섰다. 영수는 ‘아이고! 인자 다 왔네. 새끼들 아는 체 해갔고, 쪽팔리 죽는 줄 알았네.’하면서 리어카를 내려놓았다. 아직도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흘러 옷이 흠뻑 젖었다.      

   장손 승찬이가 전문학교로 진학했다. 전문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 교사가 되거나 고급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승찬이는 수재로 소문난 청년이라 국비 유학을 갈 거라고 주변에서 입을 모았다. 승찬이도 그 말이 싫지 않은 듯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으며 좋아했다. 그동안 그도 유학 시험을 준비해오고 있었다.   

   할배는 장손이 전문학교에 진학하자, 영찬이가 출세하여 집안을 일으키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올랐다.

   “장손이 잘돼야, 집안이 일어서는 기라!” 할배의 장손에 대한 기대와 함께 ‘장손 제일’ 인생철학은 확고했다.

   영수는 오늘도 아침부터 지게를 지고 소 꼴을 배러 논두렁으로 밭두렁으로 다녔다. 낮에는 나무하러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나무를 한 짐하고, 지평선이 펼쳐지고 들녘 끄트머리에 수평선이 아스라이 드러나 보이는 봉현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 너머 도시를 그려보기도 하고, 도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상상하면서 어느새 가슴 한구석에 꿈을 키웠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산에 올라가 온갖 상상을 했다. 영수 동무들은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일자 무식꾼이 되어 일에 파묻혀 지내 온 게 억울했다. 학교도 못 다니면서 일만 죽으라고 해도 돌아오는 건 칭찬은커녕 욕 바가지에다 얻어맞기까지 했으니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고 분하기도 했다.

   봉현마을 영수 동무인 동수는 내명년에 고등학교로 진학한다고 하고, 이태째나 꿇고 국민학교에 들어간 동규와 아랫마을 성식이도 중학생이 되었는데, ‘나는 뭐란 말인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면서 할배와 아배에 대한 원망이 쌓여갔다.  

   ‘내 난중에 장개 가면, 우리 아아들은 국민핵교부터 부산에서 보낼 끼다. 모두 대학까징 공부시킬끼다.’

   그는 마음속으로 무식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영수는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아내와 아이들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대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고, 도시 학교와 교실과 운동장이 보이고, 예쁜 아내의 얼굴도 어렴풋이 보였다. 구름 위에다 온갖 그림을 그렸다. 지우개로 지우지 않아도 구름이 흘러가면서 그림은 저절로 지워졌다.

   한 번은 영수가 뒷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산 주인이 나무를 하러 왔다. 그가 주인을 보고 덜컥 겁이 나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는데, 영수를 알아본 산 주인이 “하동장 작은 손자 아이가!” 하길래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예”하고 대답했다.

   “너거 할배는 공부 마이 한 학자 아이가! 와!, 손자는 공부를 안 시키노? 허허! 참!” 산 주인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주인은 영수를 보고 “솔가지는 비지 말고, 잡목하고 새만 비야 된다.”하고 일렀다.

   영수는 속으로 ‘휴’하고 한숨을 내려놓고, “예”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뭇짐은 금세 한아름이 되었다.

   “어르신, 고맙습니데이. 그라믄 지가 먼저 내리갈랍니더.”

   “오냐! 오냐! 니가 참 용하다!” 산 주인이 말했다.

   마을에 내려오니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일본 넘들이 중국 땅도 다 차지했다 카데요.”

   동수 엄마가 말하자 거기에 모인 아낙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만주 땅에다가 만주 괴뢰국이라 카는 나라도 세았다 카데요. 내사 일본 넘들이 우리 동네까징 쳐들어올까 바 무섭십니더.” 부녀회장이 말했다.  

   ”하이고, 쇠붙이하고 금붙이 다 뺏들어 가갔고, 총알도 만들고 한다 카데요.“ 지동댁이 이야기를 거들었다.

   ”저 옆동네는 묵을 양석도 뺏들어 갔다 카데요. 우리 동네까진 안 왔시면 좋겠는데.“ 부녀회장이 말했다.  

   아낙들 얘기를 듣고 보니 마음이 불안하고 긴장이 되었다. 영수는 입안이 말라 침을 꼴깍 삼켰다. 집에 돌아온 영수는 나뭇동을 바깥마당 나무 삐가리에 쌓아놓고 장독대로 가서 세수를 했다. 때마침 술이 한 잔 된 아배가 마을회관에 마실 갔다가 안채로 들어서면서 영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잔갑아! 내일부터 승이 행님 따라 댕기믄서 머슴 일 배우거라.”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아배가 말했다.

    영수 나이 이제 열세 살이다. 한창 뛰어놀 나이에 글을 배우기는커녕 머슴 따라다니면서 일 공부 하라니······.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어메가 남편이 하는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녀는 가슴에 못이 박힌 것처럼 답답하고 숨쉬기도 힘들어서 대청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아이고! 우짜믄 좋노? 얼라 한테 머슴 일 배우라 카는 아부지도 다 있나?” 어메가 울먹이며 말했다.

   할매가 대문간으로 들어오다가 며느리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무슨 사달이 난 줄 알고 부리나케 쫓아왔다.

   “와? 와! 메느라! 무신 일이고?” 할매가 물었다.

   어메가 방금 남편이 했던 말을 시에미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할매가 며느리가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부엌으로 가서 냉수 한 사발을 마시고 대청에 누워 있는 아배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애비야! 니는 우째 얼라 보고 ‘머슴 일 배우거라’고 하노? 시상에 아부지가 돼갔고 우째 그래 매정하노?”

   대청에 늘어지게 누워있던 아배가 부스스 일어나 앉으면서 대뜸 고함을 질렀다.

   “뭐시이라고요? 내 보고 실성했다는 말인기요? 어매도 그런 말 하지 마소. 아부지한테 물어보소.”

   아배가 안방으로 들어가고나자 할매는 사랑채로 건너와 영감에게 물어보았다.

   “영감! 작은 손자, 잔갑이 머슴 일 배우라고 하는 기 옳은 소리인기요?”

   “머슴 일 안 배우믄 농사는 누가 지을끼고? 머슴 승이가 평생 우리 집에서 늙어 죽을 때까징 일하라꼬? 멀쩡한 손자 넘이 있는데?”

   할매가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아서 방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숨을 헐떡이며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우자믄 좋노!”하고 눈물을 글썽글썽했다. 할매는 속으로 내가 못 볼 꼴 다 보고, 이래 살믄 뭐 할끼고, 얼른 죽어야제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그러다가 잔갑이 장개는 보내놓고 죽어야제, 저그 할배하고 애비가 잔갑이한테 장개갈 때까징 우째할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 있는 영감을 흘끗 쳐다보니 옹고집이 볼에 탱탱 붙은 얼굴이 오늘따라 유달시리 밉게 보였다. 할매가 눈을 흘기면서 장지문을 나서자 할배는 무안해서인지 뒤로 돌아 앉았다.   

   영수는 내일부터 하동장댁 작은 머슴이다. 큰 머슴 승이를 따라 다니면서 머슴 일을 배워야 한다. 그날 밤 영수는 이부자리에서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있었다. 내일부터 나는 이 집 머슴이다. 인자는 빼도 박도 못하는 매인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밤중에 보따리를 싸 들고 도망가고 싶었다. 갈 곳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늦게라도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글을 배우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할배와 아배에겐 씨도 먹히지 않을 말이다.

   다음날 영수가 할매에게 구구절절 얘기를 했다. 자기도 핵교에 다니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형 승찬이와 동생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바라 야야. 잔갑이가 핵교 댕기고 싶다고 울면서 하소연하는데 우째 안되겠나?” 할매가 아들인 아배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뭐시라꼬요! 어매는 택도 없는 소리하지 마소! 장남만 공부시키믄 됐제.”

   아배는 일언지하에 할매가 한 말을 거절하였다. 할매가 사랑방으로 건너와 영감에게 읍소를 했다.

   “영감, 작은 손자 핵교 보내서 까막눈이라도 면해 줍시더. 내사 까막눈이라 시상이 우째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앞으로 시상은 농사를 짓더라도 글은 읽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겄소?”

   “머시라꼬? 장남이 출세하믄 집안 일어날낀데 차남을 말라꼬 공부시키노! 농사 공부나 열심히 해야제.” 할매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할매가 영감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통사정해도 통하지 않았다. 할매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영수는 하동장댁 작은 머슴으로 살아야 한다. 할매도, 어메도, 영수도, 모두 무슨 방도가 없었다. 그동안 영수가 꿈꾸어오던,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싶다는 실날 같은 희망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영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제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전 02화 02 집안 심부름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