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잔치인가
2017년 첫 데모데이를 기획할 때,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데모데이는 오직 스타트업을 위한 무대라고.
9개 스타트업을 무대에 세우고, 순위를 매겨 차등으로 지분투자를 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창업허브 10층 강당을 빌렸고,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왔다.
언론 보도도 15건이 나왔다. 외부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회사 안에서는 차가웠다.
3개월 후 새로 부임한 CEO가 물었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 뭐가 도움됐어?" 나는 뭐 열심히 대답했고, 사업은 살아 남았지만 깨달음이 있었다.
뭐 돈을 얼마 쓰진 않았지만, 정작 내부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데모데이는 쇼가 아니라 비즈니스다.
그리고 그 비즈니스의 고객은 외부 뿐만이 아니라 내부다.
대부분 요즘에는 내부에 더 신경쓰는 것 같긴 해보이지만...
이 깨달음이 오기까지 1년이 걸렸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우리는 내부 IR데이와 외부 데모데이를 병행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게 있다.
스타트업 대표 혼자 무대에 서면, 그건 그냥 IR이다.
하지만 우리 직원이 함께 무대에 서면, 그게 진짜 오픈 이노베이션의 증거가 된다.
발표 순서를 이렇게 바꿨다. 먼저 스타트업 대표가 5분간 자신들의 사업 모델을 설명한다.
그다음 3분은 현업 직원이 실제 협업 사항과 성과를 이야기한다.
구체적인 숫자와 함께. 마지막 2분은 다시 대표가 향후 협업 비전을 그린다.
이 방식이 통했다.
무대 위에서 현업 직원이 "이 솔루션으로 업무 시간이 30% 줄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객석에 앉은 외부 관객 뿐 아니라 다른 부서 팀장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행사가 끝나면 내게 연락이 왔다. "우리 팀도 저거 해볼 수 있을까요?"
퓨처나인 2기 데모데이였다.
그날 나는 오프닝 발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카드사는 곧 망할 수도 있습니다." 객석이 술렁였다. 우리 회사 임원들도 앉아 있었다.
"하지만 데이터 기반 마케팅 컴퍼니로 전환한다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환의 핵심은 스타트업과의 협업입니다."
위험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위기의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오픈이노베이션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업무로 남는다.
다행히 그날 이후, 오픈이노베이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혁신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2020년, 코로나가 왔다. 내부 IR데이 등 대규모 행사는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고급스러운 영상을 만들어 사내 곳곳에서 상영했다.
본관 1층 로비의 대형 스크린, 엘리베이터, 식당, 주요 회의실. 선발한 스타트업을 소개하는 2분짜리 영상이 2개월 내내 돌아갔다.
효과는 의외였다. 오히려 더 많은 직원이 봤다. 데모데이에 와야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 임원들도 점심 먹으러 가다가 영상을 봤다. "이거 누구야?" 물어보는 빈도가 늘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우리는 온오프 연계 방식을 계속 실험했다. 소규모 오프라인에 온라인 중계를 결합했다.
참석 인원은 줄었지만, 도달 범위는 오히려 넓어졌다.
좋은 스타트업을 데려오려면 영업을 해야 한다.
우리는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투자사들, 정부 기관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좋은 스타트업을 추천받았다.
그리고 직접 찾아갔다.
아이디어스, 청소연구소, 파인트. 이미 잘나가던 이 스타트업들을 설득하려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까였다.
"저희는 이미 잘되고 있어서요."
"대기업이랑 하면 속도가 안 나올 것 같아서요."
"다른 프로그램 제안도 많이 받는데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이해도 됐다.
잘되는 스타트업에게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게 뭔가? 돈? 투자사가 더 많이 준다.
네트워크? 이미 충분하다.
우리만이 줄 수 있는 건 카드사의 고객데이터를 활용한 마케팅이었다.
이를 통해 와디즈, 웨딩북, 김캐디, 에브리타임 등 다양한 스타트업을 영업했다.
우리의 리소스가 진짜 도움이 될 수 있는 곳. 그게 더 의미 있는 협업이다.
성장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스타트업이 우리의 메인 타겟인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매 기수 상징적인 팀들이 1~2팀은 필요했다. 그게 브랜딩이고 마케팅이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오픈이노베이션 행사가 너무 많아졌다.
차별화가 필요했다. 우리는 프라이빗 전략을 택했다.
100명 내외만 초대한다.
우리 스타트업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사람들만.
그리고 테이블 배치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호텔 연회장의 10인 테이블 10개.
각 테이블마다 투자자 2명, 잠재 고객사 담당자 2명, 우리 회사 관계자 2명, 스타트업 대표 2명, 그리고 네트워킹 퍼실리테이터 1명.
이 조합을 만들기 위해 한 사람이 불참하면 전체 테이블 구조를 다시 짰다.
왜 이렇게까지? 데모데이의 가치는 무대 위가 아니라 테이블 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투자자와 스타트업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2시간 동안 이야기하는 것.
그게 진짜 데모데이의 목적이었다.
전문경영인 체제의 어려움 중 하나는, 새로 온 대표가 스타트업 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신임 대표는 우리가 1년 넘게 준비한 GP(General Partner) 설립 보고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게 뭐가 중요해?"
그러다 데모데이가 왔다. 우리는 그 대표를 특정 테이블에 앉혔다.
같은 테이블에는 대형 유통그룹의 CIO와 유명 VC 대표가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KB퓨처나인은 진짜 잘하네요. 우리도 이렇게 하고 싶은데."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KB퓨처나인 평판이 정말 좋아요."
"요즘 젊은 직원들 뽑으려면 이런 거 해야 해요."
다음 주, 그 대표가 나를 불렀다. "그 GP 건, 다시 검토해보자. 100억 정도 괜찮을 것 같은데."
1년 동안 설득에 실패했던 안건이, 2시간의 데모데이에서 해결됐다.
돌이켜보면 7년 동안 7번의 데모데이와 3번의 내부 IR데이를 했다.
매번 달랐다. 초기의 Mass형 행사에서 시작해,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코로나를 거쳐, 결국 소수 정예 프라이빗 방식에 안착했다.
가장 큰 변화는 목적의 명확화였다.
데모데이는 스타트업만을 위한 무대가 아니다.
우리 회사 내부를 설득하고, 외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실질적인 비즈니스를 만드는 도구다.
이 목적이 명확해지자, 형식은 중요하지 않아졌다.
호텔 연회장이든 사내 로비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핵심만 지키면 됐다.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진짜 협업의 증거를 보여줘라. 현업 직원이 무대에 서게 하라.
둘째, 내부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보고 듣게 하라. 간접 보고로는 안 된다.
셋째, 실질적 네트워킹이 일어나게 하라. 구경하는 행사가 아니라 관계를 만드는 자리로.
데모데이가 끝나면 성과를 보고해야 한다. 초기에는 숫자를 나열했다.
"참석자 300명, 언론 보도 15건, 협업 MOU 8건."
임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래서?"
ROI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투자 ㅇ억원 대비 평가 수익 24억원."
하지만 이것도 설득력이 약했다.
"평가 수익이잖아. 실제로 나온 건?"
결국 이야기로 바꿨다. 숫자는 배경이고, 중심은 변화의 과정이다.
월 거래액 1억원이던 스타트업이 어떻게 30억원이 됐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 회사는 무엇을 얻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한 분기 보고 때, 나는 트립비토즈 이야기를 했다. 3년 전 작은 여행 플랫폼으로 시작해, 지금은 월 100억원 거래액을 만들고 있다는 것. 우리의 투자 ㅇ억원이 지금 12배의 가치가 됐다는 것.
더 중요한 건, 3년간 수수료 수익으로 ㅇ억원을 벌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카드사들이 벤치마킹하려 했지만 우리가 지분을 갖고 있어서 못했다는 것.
이야기가 끝나자 CFO가 물었다. "이런 사례가 또 있어?" 그제야 관심이 생긴 거다.
성공 사례만 보고하면 신뢰를 잃는다. 실패도 보고해야 한다. 하지만 방식이 중요하다.
"A스타트업 협업이 실패했습니다"가 아니라, "A스타트업 협업을 통해 우리 데이터 보안 프로세스의 문제점 3가지를 발견했습니다. 8천만원을 써서 5억원짜리 잠재적 사고를 예방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훈으로 B스타트업과는 완벽한 협업을 진행 중입니다."
실패를 학습으로 전환하면, 실패도 자산이 된다. 중요한 건 투명성이다. 뭐가 잘못됐는지, 왜 그랬는지, 다음엔 어떻게 할 건지. 이걸 솔직하게 말하면, 오히려 신뢰가 쌓인다.
오픈이노베이션 성과는 분기로 재단할 수 없다. AB180과의 협업은 첫 6개월 동안 가시적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마케팅 비용 절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년차에는 연 ㅇ억원을 절감했고, 3년차에는 ㅇㅇ억원을 절감했다. 만약 분기 단위 평가에 집착했다면, 6개월 만에 중단했을 것이다.
장기적 관점을 유지하려면, 임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단기 성과 프로젝트와 장기 투자 프로젝트를 나눠서 관리한다. 단기는 70%, 장기는 30%. 단기로 빠른 성과를 만들어 신뢰를 얻고, 그 신뢰로 장기 프로젝트를 보호한다.
그리고 장기 프로젝트도 마일스톤을 둔다. 3개월마다 중간 점검을 하되, 최종 목표는 2-3년 뒤에 둔다. 중간 점검에서는 방향성만 확인한다. "예상대로 가고 있는가, 방향을 틀어야 하는가." 성과는 묻지 않는다.
오픈이노베이션의 진짜 가치는 복리효과에 있다. 1년차에 스타트업 A와 협업해서 업무 효율 10%를 개선했다. 2년차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스타트업 B, C와 협업해서 30%를 개선했다. 3년차에는 내재화된 역량으로 자체 개발까지 하며 70%를 개선했다.
선형 성장이 아니라 기하급수적 성장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네 가지다.
첫째, 기술이 쌓인다. 이전 협업에서 배운 걸 다음 협업에 쓴다.
둘째, 네트워크가 쌓인다. 성공한 스타트업이 다른 좋은 스타트업을 추천한다.
셋째, 내부 역량이 쌓인다. 직원들이 혁신을 경험하며 역량이 성장한다.
넷째, 브랜드가 쌓인다. 성공 사례가 알려지면서 좋은 스타트업이 먼저 찾아온다.
이 복리효과를 만들려면 최소 3년은 버텨야 한다. 1년차는 씨앗을 뿌리는 시기다. 2년차는 싹이 트는 시기다. 3년차가 되어야 수확이 시작된다. 많은 기업이 1년 만에 포기한다. 복리효과를 경험하기 전에.
오픈이노베이션의 성과 중 일부는 측정할 수 없다. 조직 문화의 변화, 직원들의 혁신 마인드셋, 외부에서 보는 우리 회사의 이미지. 이런 건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느껴진다. 프로그램 초기에는 현업 직원들이 참여를 꺼렸다. "또 일 늘어나네." 3년이 지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리 팀도 스타트업 하나 붙여주세요." 자발적 참여가 늘어났다.
신입사원 채용 설명회에서도 달라졌다. "KB카드는 보수적일 것 같았는데, 스타트업이랑 협업한다는 게 신선했어요." 오픈이노베이션이 채용 경쟁력이 된 것이다.
이런 정성적 가치를 무시하면 안 된다. 측정하기 어렵다고 가치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ROI만 추구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변화를 놓친다.
오픈이노베이션 담당자로서 가장 어려운 건, 모든 사람에게 뭔가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타트업에게는 성과를, 현업에게는 시간을, 임원에게는 예산을, 외부 파트너에게는 협조를.
그리고 성과가 나면 "원래 잘될 일이었어"가 되고, 실패하면 "왜 제대로 못했어"가 된다. 성공의 공은 분산되고, 실패의 책임은 집중된다.
이게 싫어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걸 견디고 버티면, 어느 순간 바뀐다. 작은 성공들이 쌓이고, 신뢰가 쌓이고, 네트워크가 쌓인다. 그러면 일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제는 내가 요청하기 전에 먼저 연락이 온다. "좋은 스타트업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우리 팀도 협업하고 싶은데요."
7년이 걸렸다. 처음 3년은 설득의 시간이었고, 다음 2년은 증명의 시간이었고, 마지막 2년은 확산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시스템이 돌아간다. 그게 성공의 증거다.
데모데이를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된다.
화려한 행사를 만들고, 언론에 나가고, 사진 찍고. 그게 전부면 실패다.
데모데이는 수단이다. 내부를 설득하고, 네트워크를 만들고, 실질적 협업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
이 목적이 명확하면, 형식은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다.
코로나 때는 영상으로 했고, 회복기에는 소규모로 했고, 안정기에는 프라이빗으로 했다.
형식은 계속 바뀌었지만, 목적은 같았다.
"진짜 협업을 만들자." 이 목적만 지키면, 데모데이는 성공한다.
그리고 데모데이 없이도 오픈이노베이션은 가능하다.
데모데이는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크게 할 필요도 없다.
회사의 상황과 목적에 맞게 설계하면 된다.
중요한 건 '왜 하는가'다.
'어떻게 하는가'는 그다음 문제다.
성과 관리도 마찬가지다. 숫자를 모으고 보고서를 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진짜 목적은 학습이다. 뭐가 잘됐고, 왜 잘됐고, 어떻게 반복할 수 있는가.
뭐가 실패했고, 왜 실패했고, 다음엔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이 학습이 쌓이면, 오픈이노베이션의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7년 전 우리의 협업 성공률은 30%였다.
지금은 70%다. 2배 이상 높아진 이유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 분기 실패 사례를 분석했다.
왜 실패했는지, 패턴은 무엇인지,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이게 쌓여서 선발 기준이 됐고, 협업 프로세스가 됐고, 리스크 관리 체계가 됐다.
실패를 감추면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
실패를 드러내고 분석하면, 실패가 자산이 된다. 성과 관리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7년간 데모데이를 기획하고 성과를 관리하며 배운 것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내부가 외부만큼 중요하다. 화려한 외부 행사만큼 소박한 내부 설득이 가치 있다.
그래야 지속 가능하다.
둘째, 이야기가 숫자보다 강하다. 숫자는 배경이고, 중심은 변화의 과정이다.
셋째, 실패도 자산이다. 투명하게 공유하고 학습하면, 실패가 다음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
넷째, 장기적 관점을 잃지 마라. 분기 단위 압박에 굴하지 말고, 최소 3년은 투자하라.
하지만, 항상 스타트업처럼 6개월, 1년 단위로 업무와 조직을 증명해야 한다.
다섯째, 복리효과를 노려라. 개별 프로젝트의 성공이 아니라, 전체 생태계의 성장을 추구하라.
이 다섯 가지만 지켜도, 데모데이는 의미 있어지고, 성과 관리는 가치 있어진다.
그리고 오픈이노베이션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업무가 아니라, 회사의 핵심 전략이 된다.
다음 챕터에서는 관점을 바꿔, 스타트업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대기업의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에 언제 지원해야 하고, 언제 포기해야 하는가.
4,000개 스타트업을 만나며 발견한 패턴들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