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만들어가는 독특한 도시색의 문화도시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년)에 사비로 옮길 때까지 웅진은 64년간 백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웅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벽이 공산성이며 웅진성,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문화도시 관련 회의가 있어 공주에 가게 되었는데 조금 일찍 도착하여 가장 먼저 간 곳이 공산성입니다. 이번이 두 번째 공주행인데 첫 방문에 공주의 도시 형태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게 되어 도시 전체를 보기 위해서 공산성에 올랐습니다.
공산성에서 바라보는 공주와 주변의 모습은 요새와도 같았습니다. 일단 금강이 북쪽에서 서쪽으로 굽어 흐르고 있고, 서쪽에는 정지산, 동쪽으로는 공산, 남쪽으로는 봉황산과 월성산 등 산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금강과 산성이 이중으로 보호해주는 천혜의 요새도시인 것입니다. 백제가 서울 인근의 위례성에서 500여 년 간 수도를 유지하다가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옮길 곳을 찾았으니 수비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을 정한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웅진이 수비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한 나라의 수도가 되기에는 배후가 너무 약하고 좁았습니다. 그래서 64년이라는 짧은 기간 수도 역할을 하고 이후에는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기게 됩니다. 이전 글(도시읽기2. 부여와 문화재)에서 부여의 넓게 펼쳐진 도시 이야기를 했는데 웅진에서 부여로 수도를 이전할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공주의 특징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도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도시여서 도시를 관통하는 하천(제민천)도 있고, 도시의 폭이 좁아서 굉장히 압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공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금강을 건너던가 남쪽의 계곡 사이를 지나와야 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이 길은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는 국도 1호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길인데 금강을 건너는 금강대교로 불리는 금강철교는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의 공법으로 지어진 교량으로 철도 교량이 아닌 자동차가 지나가는 도로 교량이었습니다. 다리의 폭이 좁으며 인도가 따로 없어 사람들이 길 한복판으로 다니는 모습이 정말 인간적이었습니다.
도시의 중심에는 제민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계곡이니 당연히 하천이 흘렀을 텐데 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작은 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사시사철 물이 흐르고 있으니 도시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양쪽에 산이 있는 상황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하천에는 길도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 집들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천도할 시기에도 제민천 주변으로 마을이 있었을까요? 아무튼 1500년 이상된 도시로서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성장한 것인지 굉장히 압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도심을 걷다 보니 도시가 잘 다듬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이지만 도시 확장이 기존 도심과 끊어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도심의 분리 없이 적절한 밀도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도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세련되게 손을 댔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산성 주변에도 그런 인상이었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공산성 역사문화환경 개선사업'이 있었고, 공주시 원도심으로는 고도 이미지 찾기 사업으로 한옥을 늘리는 등 다양한 사업으로 공주의 도시경관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도로 등 도시 인프라 개선을 통해 도시가 잘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공주에는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 핵심에는 문화와 사람 그리고 멋진 공간들이 있었습니다.
공주에 가기 전에 가볼만한 곳들을 추려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곳은 공산성이었습니다. 아침시간 비 내리는 세련되게 가꾸어진 공산성은 정말 운치가 있었고 공주의 전경 일부를 볼 수 있는 훌륭한 곳이었습니다. 오전 일정을 마치고 보고 싶은 곳은 제민천 주변의 원도심이었습니다. 출발점으로 생각한 곳은 구 공주읍사무소(현 공주역사영상관)였고 반죽동 당간지주, 공주제일교회, 봉황재, 가가책방 그리고 카페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원도심에서 가장 먼저 들른 구 공주읍사무소는 정말 멋진 건축물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휴관되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빨간 벽돌의 근대건축물인데 현관이 돌출되고 좌우 대칭이면서 주두(entablature)가 있는 기둥이 있어 정면성을 강조한 모습이 지금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이런 멋진 공간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0년에 디자인카페를 운영했다가 지금은 역사영상관으로 바뀌었지만 이런 멋진 건축물을 더 멋있게 쓸 수 있지 않을까요? 2018년 여름 런던에 계신 김정후 박사님의 안내로 영국 바스(Bath)를 갔을 때 오래된 목욕탕 건물을 멋진 레스토랑으로 민간이 운영하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큰 실험이 될 수도 있지만 이 공간을 공공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닌 전국적인 공모 등을 통해 로컬의 유전자를 가진 멋진 민간 상업공간으로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공공이 가진 건물을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제도적으로 힘들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공공에서 운영할 경우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점과 유지를 위한 예산이 꾸준히 필요하며 결국 공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종착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공간을 미슐랭 스타를 받을 정도의 실력 있는 셰프, 멋진 공간을 만들어줄 건축가, 예술적 품질의 지역 농산물을 재배하는 지역 농부들과 콜라보를 하여 멋진 레스토랑을 만들어낸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멋진 도시는 하나의 공간, 한 명의 시민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멋진 공간들, 창조적인 시민들이 모여서 임계치를 넘을 때가 돼서야 멋진 도시로 알려지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공공이 운영하는 구 공주읍사무소를 보면서 조금 우울해졌지만 제민천 주변을 걸어 다니면서 공주를 시민들이 만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즐거워졌습니다. 제민천 주변으로 많은 카페와 책방들이 아름다운 제민천과 어우러져 공주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가가책방(대표 서동민)에 들렀습니다. 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어 전화를 걸어보니 가까운 곳에 있다고 금방 오시겠다고 해서 주변을 둘러보며 기다렸습니다. 오분도 안되어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주인장이 문을 열어주어 들어가 보니 서너 평 남짓의 사람 냄새가 나는 작은 책방이었습니다. 길가의 유리문으로 보이던 진열된 책들은 건축을 전공한 저에게도 친숙한 건축과 도시에 관한 책들이어서 시민들이 접하기는 어려운 책들인데 어떻게 저렇게 모으고 진열하셨는지를 여쭤봤더니 동네 책모임을 하고 있는데 그 주제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동네를 바꿔보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동네가 바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동민 대표도 이야기하기를 가가책방이 들어오고 나서 바로 옆에 작업실이 들어오니 그 골목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지역주민이 노력해서 콘텐츠를 만들고 지역에 어울리는 공간이 들어오면 동네가 바뀌는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동네 책모임에는 봉황재를 운영하시는 퍼즐랩의 권오상 대표도 함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드렸더니 가가책방에서 오분 거리에 업스테어스라는 코워킹 사무실을 만들었는데 거기 있다고 해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마침 퍼즐랩의 이병성 이사님도 중간에 들어오셔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업스테어스는 봉황재나 다른 여러 기회로 공주에 오는 분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체로 큰 이득을 생각하지 않지만 지역의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시설이라 생각하고 운영을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별적인 공간의 운영이 아닌 지역 전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간 기획을 할 때 최소한의 유지만이 아니라 사업이 잘 되도록 기획을 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나 혼자 잘된다고 해서 침체된 지역이 살아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역 주민들과 책모임을 하면서 지역이 나아갈 방향을 같이 고민하고, 필요한 공간을 만들어가고, 행정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민관협력까지 시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공주의 오 년 후 십 년 후의 모습이 엄청 기대됩니다.
대화를 마치고 잠시 여유를 가져보려고 눈여겨봤던 카페를 찾았습니다. '루치아의 뜰'이라는 한옥 카페였습니다. 작은 한옥과 작은 마당을 주인장께서 지인들과 함께 손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며 품앗이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며 추천해주는 홍차와 함께 공주의 특산품인 밤 타르트를 먹고 있으니 새벽부터 움직이고 회의를 했던 피곤함이 가시는 듯했습니다. 공주를 떠나기 전에 식사도 할 겸 바로 옆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국밥집인데 30년(1987~2015)된 숙박업소 '석화장'을 리모델링하여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공주에서는 이런 오래된 건물의 유전자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어서 공주의 특색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주는 문화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예비문화도시에 선정되었고 준비를 잘해서 2021년에는 문화도시에 선정되기 위해 공주시와 시민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문화도시 사업을 잘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진짜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역에 문화적 유전자를 뿌리내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주는 문화도시가 될 수 있는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제라는 역사적 문화자산도 있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멋진 시민들도 계시고,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도시의 독특한 입지가 만든 도시 풍경과 문화도 있습니다. 문화도시는 공주라는 도시의 문화적 토대 위에 시민들이 문화적으로 원하는 바를 찾고,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주는 이미 멋진 문화도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의 분위기를 잘 유지하고 멋진 결과물들을 만들어서 다음에 올 때는 지금보다 더 멋지고 매력적인 공주이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