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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조각. 유산균의 늪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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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조각



감기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느라

뜻하지 않게 식사를 잘 챙기는 중.

빈속에 먹으면 쓰리다.

흰 약이 많아서 그런지

감기약은 유난히 쓴 느낌이다.

오늘 저녁은 고사리밥에

시금치 무침과 무나물 볶음.

대신 약에 항생제가 있기 때문에

유산균을 안 먹고 있다.

항생제와 유산균은 상극이라

피해야 하는 조합이다.

유산균을 마침 다 먹은 참이기도 해서

부러 안 사두고 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유산균을 사두면,

먹을 준비를 해두면 먹을 수 있으려나 싶은

밑도 끝도 없는 꼬리잡기.

그래서 주말에 유산균을 주문했다.

냉장이나 냉동 유산균은

온도가 중요한지 빨리 배송이 온다.

항상 드는 생각인데,

유산균 택배 박스는 왜 이렇게 클까?

왜 쓸데없이 커서 쓰레기만 많고

내 감정도 쓰레기가 될까?

아이스팩이 필요하다고 해도

스티로폼 박스가 불필요하게 크다.

유산균을 서른 개쯤 시켜도 마찬가지일 정도로.

박스에 붙은 운송장 스티커를 제거하다가도

빙빙 둘러진 테이프를 제거하다가도

겨울이라 꽝꽝 얼어있는 아이스 팩을 잘라서

싱크대에 붓다가도 영 알 수 없는

유산균 택배.

요즘 먹는 곳 말고도 다 똑같다.

냉동 배송으로 오는 유산균은

배보다 배꼽이 크다.

진짜 좀 적당히 했으면 싶다가도

오프라인에서 살 수 없어 슬프고

장에 잘 맞으니 다른 제품을 먹을 수도 없어

슬픈 마음으로 열심히 쓰레기를 분리할 뿐이다.

나 하나 살리자고

모든 걸 파괴하는 기분.

역시 인간이란 해로운 존재다.

특히 지구에게는.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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