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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조각. 무거운 목도리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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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조각



목도리를 떨어뜨렸다.

미세먼지 농도와 함께 기온이 올라갔지만

아직은 겨울이니까

짧은 머플러라도 꼭 하고 다닌다.

전날은 목티를 입었다가 더워서 혼났다.

퇴근 시간대에서 빗겨간 늦은 시간.

반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다행히 나보다 먼저 내 목도리를 발견해주어

밟히지는 않았다.

짐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과

진즉 벗어서 들고 있는 코트

그리고 바닥에 안 닿는 곳 없이 떨어진 목도리.

짧은 순간에 모든 게 짐처럼 느껴져서

다 내려놓고 싶었다.

갈증이 이는 건,

미세먼지가 심해서라고 믿고 싶다.

내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게

모두 결점으로 보이는 순간,

목적도 의지도 사라지고 빈 껍데기만 남는다.

진심 같은 건 뭘까.

진실도 아니고 구심점도 아닐 텐데.

어릴 적 과외 선생님 생각이 난다.

선생님은 어른이었지만,

그때까지 만나온 어른과는 달랐다.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해주셨고,

못할 때에도 비난 따위 낄 틈 없이

가르침을 주셨다.

좋은 일이 있으실 때는 함께 기뻐해달라고,

힘들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실 때는

새로운 시각을 나눠달라 하셨다.

그리고 언제나 좋은 점을 바라봐 주셨는데.

너 같은 건-이라는 말을 달고 살던 어른과는 달리

너에게는-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던 선생님의 말.

너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구나,

너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어.

나는 그 말을, 너무도, 닮고 싶었다.

선생님이 내게서 본 모습도

선생님의 모습도 생소했던 시간.

돌이켜 볼수록 감사하고 소중한 시절.

오늘날의 나도

선생님에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너에게는-으로 시작되는

편견 없는 다정한 눈빛이 사무치게 그립다.

여느 때처럼 출근하고 퇴근하고

방금 막 귀가했다.

오늘의 나는 초미세먼지만큼 작아서

어디에도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날이 흐려서 별을 못 본 것이 아쉽다.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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