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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조각. 아홉 수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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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조각



응달에서 눈이 녹으려면

양달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볕의 양이 다르니까.

양지에서의 온기와 알록달록한 빛도.

한쪽에서 웃음꽃이 만개해도

같이 어울릴 수 없다.

그런 차이가 있다.

불공평하다 하면 불공평하고

치사하고 더럽고.

이내 곧 서러워져도

눈이 이르게 녹는 일 따위는 없다.

응달이니까.

다른 애들은 푸른 잔디에서 뛰놀 때,

녹기는커녕 꽝꽝 언 눈길에

넘어질까 싶어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더라도.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을 기다려야 한다.

다음조차 안 된다면

좀 더 먼 어딘가의 미래를 믿고

살아가는 수밖에.

그간 복잡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겨울 동안 아껴 읽던

최진영 작가님의『어떤 비밀』도 끝을 냈다.

여러 글을 읽다 보면

희망하는 양지에도 외면하고 싶은 음지에도

천국과 지옥까지 모든 곳을 쉼 없이 오가고,

그러면 밝히지 못하고 숨겨야 해서

돌덩이 같던 마음도 모래처럼 바스러져

잠이라도 잘 수 있다.

악몽을 피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산다는 건 매 순간 계획을 다시 짜는 일.

어쩌면, 계속 덧대는 것보다

완전히 무너뜨린 후에

새로 단단하게 세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뭐든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

생각지 못한 눈이 내려서

눈보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바깥 공기를 쐴 겸 우산을 들고 나갔다.

어떤 생각도 없다고 믿었는데,

날이 춥지 않다고 ‘생각’해서

장갑을 두고 나온 탓에

손이 아주 시렸다.

차라리 손이 시려서 다행이었다.

작년 마지막 날에는 공원을 걸었다.

목성을 보기도 하고

읽던 책을 마저 끝내기도 했다.

오늘은 목성도 토성도 보이지 않아서

눈이 그친 까만 하늘을 보며 걸었다.

마음만 시끄러운 걸 보면,

마음만 내려놓으면 끝인 일인 것 같다.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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