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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보영 Dec 08. 2018

김승일-문보영 현대시 인터뷰

그 많던 죽고 싶은 김승일은 다 누가 훔쳤을까-현대시 11월호

                       

      그 많은 죽고 싶은 김승일은 누가 다 훔쳤을까

                                  -현대시 김승일 시인 인터뷰          


        1. 도둑이고 싶은 자 또는 충분히 배고픈 자만 들어오시오


2018년 10월 9일 문보영 일기     


오늘 김승일 시인 인터뷰를 하러 갔다.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일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망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카페의 이름은 장프리고이다. 일찍 도착했는데 길이 복잡했다. 길도 복잡했지만 카페의 구조 또한 기괴했다. 출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일 층에는 냉장고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사람은 없었다. 건물 어디에도 이 층으로 가는 계단이 없었다. 그러나 이 층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은 시끄럽고 나만 고요했다. 이 소외감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내부에 다른 곳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프리고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남의 집 냉장고 문을 열다가 도둑으로 취급받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을 이겨내야만(혹은 즐겨야만) 하는 것이다. 아니면, 배가 고파서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열어보는 자만이 장프리고의 세계에 편입될 수 있다.      

김승일이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냉장고를 찾기도 어렵지만 골목에서 헤맬 것 같았다. 김승일이 길치라고 거의 확신했는데, 길치가 아니고서야 시를 잘 쓸 리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공간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김승일에게 문자를 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2018년 10월 9일 김승일 일기     


오늘 문보영 시인이랑 대담을 하러 갔다. 문보영과 문보영의 시를 좋아해서 내 대담은 문보영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김승일이다. 나는 매일 늦는다. 오늘도 늦었다. 냉장고가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냉장고가 많아서 다른 냉장고를 열었더니 음식이 있었다. 어느 냉장고를 열어야 되죠? 직원이 알려줘서 열어야 되는 냉장고를 열었더니 카페였다.        

                     

                           

                       2. 냉장고 안에서        

   

누가 냉장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승일(이하 김) : 하염     

문보영(이하 문) : 냉장고 안으로 들어온 걸 축하해      

김 : (아메리카노 시킨 후 문보영이 가져온 김승일 시집 <<에듀케이션>>을 훑어본다. 낡고 더러워서 기뻐한다) 열심히 읽었구나!     

문 : (망고 주스 시킴. 내가 읽은 김승일 시집을 김승일이 훑어보고 있으니, 마치 내 일기장을 김승일이 읽고 있는 기분이 든다. 에듀케이션을 내가 쓴 것도 아닌데 뭔가를 들킬 것 같아서 무언의 손동작으로 에듀케이션을 회수한다) 응, 열심히 읽었어. 근데 너 별자리가 뭐야?     

김 : 쌍둥이게자리! 마법의 주간이지. 사랑의 주간이기도 하고. 그냥 쌍둥이자리나 게자리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커프스라는 별자리 개념을 좋아하고. 거기 보면 쌍둥이자리랑 게자리가 겹치는 시기가 있더라고. 별자리나 사주 같은 것을 믿기 보다는 대부분 칭찬을 많이 해주고, 마법의 주간이라니까 굉장히 멋이 있고. 그래서 좋아.     

문 : 오, 그렇구나. 한동안 김승일 시에 기계가 자주 등장했는데 김승일에게 기계는 어떤 의미일까?     

김 : 기계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고, 입력된 규칙대로 행동하지만 그 규칙을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 규칙을 입력한 사람도 절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 기계의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인간의 감정하고는 전혀 다를 것이고. 사실은 감정도 아니지. 항상 사람들을 좋아했는데, 언제부터는 그게 너무 피곤했고. 그때 기계를 시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던 것 같아. 또 뭐랄까. 나는 기계를 시에 등장시키면서 슬럼프를 벗어났거든. 묘사하기 힘든 것, 쓰고 싶은데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것들이 있으면 기계를 등장시켰어.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기계가 등장하면 나는 이 풍경을, 사건을,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 시에 나오는 이 기계는 이해하고 있다고 썼지. 나는 그런 일을 꿈꿀 수도, 절대 이룰 수도 없지만 내 시에 나오는 기계는 그런 일을 수월하게 해낸다고도 썼지.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계는 할 수 있다고 썼어. 그리고 종국에 가면 기계의 규칙들이 모순되어서 기계가 고장 나거나 고통 받곤 했는데.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기계들의 규칙들이 어떤 알레고리를 이룰 수 있느냐? 그게 관건이었고. 그래서 사실 고장이나 고통은 알레고리에서 파생되는 것이지 시의 주제는 아니었어. 5년 정도 기계가 안 나오는 시를 쓴 게 손에 꼽아서…… 할 얘기는 많지만 이것도 다 옛날 얘기지. 이제 더는 기계시를 안 쓰기로 했어. 그래서 슬럼프가 왔지. 많이 썼으니까 이젠 다른 걸 써보고 싶어.     

문 : 궁금한데? 그럼 화자를 만들 때 어떻게 만들어?     

김 : 처음 시를 쓰면서 화자를 만들 때는 처음엔 나로 시작하고, 그 다음엔 내가 아닌 시 속의 다른 인물을 화자로 만들었어. 그런데 그렇게 하면 글에 목적이 생기더라고. 내가 남을 이해하거나, 다른 인물을 빌려서 무슨 얘기를 꼭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랄까? 남을 이해하는 척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들고. 그게 다 불가능한 얘기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인데. 처음엔 어쨌든 그랬고. 이제는 잘 모르겠다. 형식을 먼저 설계하고. 그 형식을 가장 잘 전달할 화자를 고르기도 하지만, 형식이 곧 화자의 태도가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어쨌든 화자 고르기에 대한 얘기는 항상 재밌고, 좋아. 사견이지만,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는 화자에 대한 고민을 할 줄 모르는 멍청이들도 꽤 많고. 그래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한남문학을 생산했던 것이기도 하고. 따라서 엄청나게 많은 멍청한 소비자들이 텍스트 속의 화자를 작가와 항상 결부시키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화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작가 자신이고, 타자나 현실을 반영하려고 했다는 노력은 변명에 불과할 때가 많지. 그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문 : 악당은 어때?     

김 : 난 미야자키 하야오를 좋아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는 악당이 등장하지 않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사연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그런 뻔한 얘기를 한다는 건 아니고. 예전엔 시가 잘 안 써지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꼭 다시 보곤 했어. 누구나 죽음 앞에 있고. 그런데도 누구나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누구나 저 멀리로 시선을 던지고. 판단 이전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어떤 판단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나우시카를 그렇게나 많이 봤던 것 같고. 쉽게 만들어진 캐릭터는 쉽게 소비가 가능한 것 같아. 악당을 만들기가 제일 쉽지. 조리돌림도 쉽고.     

문 : 나도 악당 그리는 거 싫어. 그래서 김승일의 <남아공 사람이 한국시를 쓰려고 쓴 시> 도 좋아해. 거기 불청객 아저씨가 나오잖아. 그런 불청객 아저씨를 미워하는 건 쉬운데 그런 인물을 단순하게 소비하거나 배제하지 않아서 좋았어. 사회성 떨어지는 인물들에게 정이 많이 가는 것 같아.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 <<그로칼랭>>인데, 거기 쿠쟁이라는, 사랑받기 어려운 성격의 인물이 등장하거든. 쿠쟁은 심각할 정도로 너무 사회성이 부족해(그래서 거의 문학적이야). 근래에 볼라뇨를 읽고 흥미가 생겼어. 화자가 항상 대상을 관찰하거든. 그런데 관찰하거나 관심을 가질 마땅한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해. 그 대상을 사랑해서도 아니고 증오해서도 아니야. 그야말로 지인(지인의 정의: 적은 아니지만 몰랐으면 더 좋았을 법한 인간들)이 대상으로 나오는 것 같아. 안 친한 지인형 소설이랄까. 딱히 그 인물에 대해 쓸 이유가 없는데 쓰는 게 좋았어. 그리고 대상을 희화화하는데 풍자나 조롱이 목적이 아니어서 더 좋았어. 오히려 희화화된 대상을 화자보다 더 애정하게 되거든. 불청객 아저씨도 그랬던 것 같아. 미드 <로스트>에도 악당이 안 나오잖아? 넌 로스트의 잭이 더 좋아 아니면 존이 좋아?     

김 : 일단은 둘 다 싫어. 난 벤이 좋아. 꼭 이뤄야만 하는 목적이 있는 사람은 너무 피곤한 사람이니까. 벤에게는 규칙이 없어. 벤은 그때그때 되게 감정적이고, 규칙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고 항상 뭐든 쉽게 갈아엎잖아. 현명하고, 모든 것에 집착하고, 왜 저렇게까지 집착하는지를 잘 모르겠어. 오히려 잭은 왜 주인공인지도 모르겠어. 우유부단은 원래 싫어.     

문: 잭은 호불호가 없어!     

김 : 호불호가 없는 게 싫어. 오늘은 오늘의 호불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존의 과거를 알기 전에는 존이 되게 좋았는데. 사연을 듣고 나서 피곤해졌어. 처음엔 존이 왜 저러는 건지, 신앙 때문인가? 무슨 신앙이지? 무슨 운명론자인가? 목적이 뭐야? 되게 미스터리했는데.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까 오히려 밝혀지기 전보다 왜 저렇게 사는지를 모르겠더라고.     

문 : 생각해보니, 악당을 만들 때, 사연 있는 악당도 싫은 것 같아. 존은 악당도 아니지만.  쉬운 적(허수아비에 가까운)을 세워두고 쓰러뜨리는 놀이를 하는 게 비겁한 것 같아. 악당에게 사연이라는 면죄부를 주는 것도 재미가 없고 그렇다고 아예 이유를 박탈해버리는 싸이코패스도 싫고 그 사이 어중간한 곳에 있는 인물들이 좋은 거 같아.      

김 : 벤은 문제를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는 이상한 사람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항상 집착병에 걸려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뭐에 집착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아 맞다. 섬이다. 자기 딸한테 집착했다가, 딸을 버렸다가, 누구랑 친구했다가, 버렸다가…… 근데 결국 섬에 대한 집착으로 귀결되잖아. 그게 너무 좋아. 헤어조크 다큐멘터리 <라 수프리에르>에 나오는 할아버지처럼. 어떤 섬에 화산 폭발한다고 해서 다 대피했는데, 헤어조크가 그 섬에 가보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고양이랑 자고 있어. 할아버지 뭐해요 왜 대피 안 했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해. “하늘의 뜻이니까요. 난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난 빈털터리요.” 벤도 그 할아버지 같아. 잘 모르겠어. 왜 안 떠나는지.     

문 : 왜 안 떠날까..     

김 : 벤은 섬에서도 살아보고 섬 바깥에서도 살아보고, 섬 바깥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아는데, 그런데도 항상 다시 섬으로 돌아가려고 해.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고.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다시 섬으로 돌아가는데. 벤은 섬에 가야 되니까 가는 거야. 자기도 가야만 하는 이유를 몰라. 그래서 사람들이 물어도 대답을 안 하지. 결국 자기도 모르는 거야.     

문 : 그러면 다음 질문. 언제까지 본인의 개인 사이트 독자를 굶길 계획이신지?     

김 : 일기는 10월 22일부터 쓸 거야. 작업실을 청소했고, 집도 매일 청소할 수 있고, 써야 되는 강의 계획서도 다 썼고. 아침에 일어나면 작업실에 가서 영어를 1시간 해보고. 아침을 먹으면 다시 자니까 아침은 안 먹고. NBA를 보면서, 오늘 아침 떠오르는 것들을 일기로 써야지. 그리고 써야만 하는 글들을 쓰고. 강의가 있으면 강의를 하고. 돈 주고 운동을 하고. 집에 가서 있었던 일들이나 했던 생각들을 일기로 써야지. 그런 다음 내 홈페이지(http://completecollection.org)에 올리는 거야. 그러면 집사람이 퇴근을 하겠지. 같이 저녁을 먹고. 밤새도록 비디오 게임을 하고. 졸리면 자고. 그 다음날엔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고. 그러면 일기를 못 쓰겠지. 아주 오래된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인데.


문 : 예전엔 어디에 썼는데?     

김 : 싸이월드에. 삼 년 전까지 싸이월드에 썼어.      

문 : 김승일에게 일기는 어떤 거야?     

김 : 설명하기 어려운 관념들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일. 사랑이나 죽음 같은 거. 그래서 중2병 일기만 썼는데. 몇 년 후에 읽어보면 지우고 싶은 그런 일기 있잖아. 근데 그런 일기만 계속 쓰니까 문장력이 좋아지더라고. 물론 시에서는 어떤 관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일을 하지 않아. 그건 그냥 불가능한 일이고, 불가능 도모는 일기에서 더 자유롭게 가능하니까. 그게 너무 재밌어. 예전엔 매일 죽고 싶다는 얘기를 썼던 것 같은데. 지금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얘기는 잘 쓰지 않고. 시에서도 좀 변했지. 예전엔 죽음 뒤에 있는 무언가를 상상해서 제안하는 일을 좋아하기도 했는데. 그게 뒤에의 뒤에야. 이번에 쓴 시. 이 시의 뒤에 뭐가 있지. 작가의 뒤에 뭐가 있지? 이런 거 좋아해.     

문 : 재밌다. 그럼 우리 이제 냉장고에서 나가자. 여기 근처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있지 않아? 공원에 가자.      

김 : 넹.          

                         3. 공원일 수 없는 곳에서     


김승일 일기 : DDP갔다. 처음 가봤다. 나는 서울시 마포구 망원(정확히는 서교동인데 망원이다) 사는데 동대문처럼 먼 곳까지 온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마치 외국에 여행 온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문보영 일기 : 장프리고를 나와 동대문문화역사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비둘기 똥을 만났다.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람이 많아져서 두려웠다. 어서 한적한 공원에 도착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공원 같은 건 없었다. 동대문문화역사공원은 동대문 DDP였다. 여긴 동대문 DDP잖아. 여기가 무슨 공원이야.. DDP 내부를 산책했다. 아무나 앉을 수 있는 높은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다. 옆 의자에 내 반려돈 말씹러를 앉혔다. 인터뷰를 이어갔다.


문 : 김승일의 N의 사분기하던 날, 네가 읽어준 시-수업에 관련한 시-도 말에 관한 거였잖아. 다 알려주겠다고. 어떻게 썼는지 다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시. 그 시에 대해서 조금 얘기해줄 수 있어?     

김 : 나는 계획하는 일을 좋아하고. 계획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고. 그래서 매일 계획만 해. 시를 계획하는 시를 쓰기도 했고. 그런데 그게 내 라이프스타일이 되니까 뭐랄까. 계획하는 일도 괴롭게 느껴지는 거야. 너무 많이 계획했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무슨 마음으로 계획하고, 내가 계획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때 왜 그렇게 신이 났는지. 좀 알고 싶어졌고. 그래서 그런 시를 썼어. 그리고 난 설명이 좋아. 설명을 하지 않으면 설명을 없앨 수 있으니까. 설명 뒤에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설명을 해. 그래서 뭐든 알려주고 싶었어.     

문 : 그래서 나도 다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 낭독회 날 네 책을 훔치러 갔다는 사실을...  N의 사분기 전 주, 처음 만난 날, 네가 죽고 싶은 김승일이랑 낭독 시집을 준다고 약속했는데 까먹을 거 같았어. 그래서 재미공작소에 가면 진열된 거나 훔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대기실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책이 없는 거야. 누가 다 훔쳤는지.. 그런데 낭독회 도중에 또 약속했잖아. 주겠다고. 있잖아. 근데 너 까먹었잖아? 모르잖아. 모르면서 시 쓰는 거니? 왜 계속하는 거야? 책 안 가져오는 거를? 책 안 가져오는 사람의 시점을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용서받을래?      

김 : 내가 맨날 늦고, 마감도 늦고, 뭐든지 다 늦어. 어떤 계절에는 평소보다 더 늦고. 아마도 호르몬 때문에 그러는 것 같고. 우울해서 다 하기 싫은 것 같고. 예전에는 우울하면 우울하다고 했는데 요즘엔 세상이 너무 좋아서. 집에만 있으니까 나쁜 일이 잘 생기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아. 그래서 내가 요즘 우울한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고. 근데 요즘에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약속도 계속 까먹는 거야. 내가 생각했는데 이게 다 우울해서 그런 것 같아. 우울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고. 그래서 10월 22일부턴 우울하지 않을 것 같고. 일기도 쓰고 너한테 책도 주고 그럴게.     

문 : 만약에 세상에서 단 한 가지를 없앨 수 있다면? 시는 제외하고     

김 : 되게 재미있는 질문인데? 그런데 왜 시만 제외해?     

문 : 시라고 대답할까 봐.     

김 : 나는 글 쓰는 거 말고는 다 질려. 물론 나도 알지. 문학보다 지루한 컨텐츠가 없다는 걸. 그래도 그걸 쓰고 있을 때는 지겹지가 않고, 항상 새로운 일처럼 느껴져. 내가 흥미로운 건 너인데. 너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왜 문보영은 시를 제외했을까?     

문 : 나는 딱 일 년만 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 지금은 아니야.     

김 : 가능하잖아.     

문 : 응. 그래서 그렇게 살았어. 일 년은.      

김 : 그게 시의 좋은 점이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게. 무시하고 살아도 앙심을 품지 않고, 가끔은 싫어해도 되고. 내 경우는 뭐랄까. 세상에 하나만 없애야 된다면 아마도 군대를 없애야하지 않을까?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 중에 하나는 군대 없애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 다음 질문은 뭐가 좋을까? 시와 시가 아닌 것의 경계는 뭐라고 생각해?     

김 : 시와 시가 아닌 것의 경계는, 스스로 이걸 시라고 우길 수 있냐 없냐인 것 같아. 내가 이게 시라고 우길 수 있는 일말의 자신감이 없으면 그건 시가 아닌 것 같아.      

문 : 무척 공감해. 우기는 걸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니, 작년에 내 일기장 제목 중 하나가 <우기는 존재>였어. 미나 추, 혹은 멋진 것들은 얼마간 우기는 과정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 같아. 그래서 작년에는 아무한테도 시를 안 보여줬던 것 같아. 아주 느린 속도로 시라고 우기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누가 먼저 시가 아니라고 말하면 김이 샐 것 같았어. 넌 극작과 나왔지?     

김 : 극작 공부가 도움이 많이 됐지. 시 쓰기 수업은 체계가 없으니까. 물론 내 수업엔 체계가 있지. 근데 내가 들었던 대부분의 시 수업은 일단 써보라고 하고, 합평하자고 하고. 잘 모르겠다고 하고. 그게 끝이니까. 물론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런 수업에서도 뭘 찾을 수 있겠지만. 극작술은 캐릭터 만들기나 플롯 만들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단계별로 숙련해 나가는 것을 기본으로 하니까. 시 쓰면서 살고 싶은 사람들이 듣기엔 너무 간단하고,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지. 실제로 나도 수업 듣는 게 고역이었고. 그런데 그 기계적인 방식 때문에 형식, 예술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연극도 좋아하게 됐어. 세상에 좋은 시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좋은 연극은 더 없거든. 연극 보러 가서 만족했던 적이 거의 없어. 그래서 연극이 좋아 만들기 어려워서. 시도 그래서 좋아. 가끔은 어떤 희곡을 쓸지, 소설을 쓸지 계획하고. 그 계획이 결실을 맺기 전에 그 계획 자체가 시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졸업하고 희곡을 하나도 안 썼네. 희곡을 쓰고 싶다. 소설도 쓰고 싶고. 아마 다 시가 되겠지만. 너는 어떻지? 어떤 관념에 관심이 있어? <책기둥>을 쓸 때는 어땠어? 요즘은?     

문 : 잘 모르겠어. 사실 관념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관념을 쓰기도 하는데 절박하진 않은 것 같아. 신? 그런데 신에 별로 관심 없어. 그냥 그 캐릭터에 매료되었던 거 같아.      

김 : 요즘엔 어떤 거에 관심이 있었어? 글이나 일기를 쓸 때에?     

문 : 진짜 고민이 없었던 거 같아. 창작에 관한 고민은 아예 거세시켰던 것 같아. 이번 연도에는.      

김 : 난 만나면 창작에 관한 얘기 되게 많이 하는데.     

문 : 난 그거 좋아. 처음에 시 쓸 때 어른들이랑 시를 써서, 또래에 대한 갈망이 되게 커. 시 쓰는 또래.     

김 : 또래 오래?     

문 : 넌 친구를 좋아해? 난 세상에서 친구가 제일 좋아. 이 돼지도 내 친구야     

                                          


문 : 그럼 일기처럼 쓴 시에 대해 말해줄 수 있어?     

김 : 나는 문학실험이 싫은데. 실험에서 어떤 가치를 찾았으면, 그냥 그 가치에서 다시 뭔가를 쓰기 시작하면 되는데. 왜 내가 어떤 가치를 찾기 위한 여정부터 따라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대부분 찾지도 못하지. 마치 이과 논문처럼. 그리고 뭐랄까, 일기처럼 시를 쓰거나 사적인 이야기로 시를 채우면 시가 항상 자폐적으로 변하니까. 그런 글은 쓰기 싫어서. 그러다 <남아공 사람이 한국시를 쓰려고 쓴 시>를 썼어. 쭉쭉쭉쭉, 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썼고. 알레고리를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알레고리가 생기니까 되게 신났어. 일기에서는 그게 잘 되거든. 의도하지 않았는데, 계속 내 글에 별자리가 생기는 걸 보는 게 재밌어. 별자리들을 편집하는 게 재밌고. 썼던 것들을 다 지우고 아까 봤던 별자리들을 생각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얘기를 해보는 것도 좋고.     

문 : 나도 오늘 시 써야 하는데....그런데 괜찮아. 메모장을 보니 마감 날짜가 9월 40일이라고 적혀 있더라고. 아직 9월 40일은 안 왔으니까. 앞으로도 안 올 거고. 그럼 넌 겨울에도 쓰리빠 신어?      

김 : 응, 열이 싫어.      

문 : 인터뷰 다했어!     

김 : 안 돼. 더 해야 돼.     

문 : 음..넌 꿈을 많이 꿔?     

김 : 안 꿔. 꾸면 엄청 괴로워서 다 잊어버려. 거의 생각이 안 나. 꿈이 신기한 사람들 보면 신기해      

문 : 지어내는 걸걸?     

김 : 재밌다. 응, 나는 꿈은 다 지어내는 거라고 생각해. <유 캔 고 홈 나우 어게인>이라는 시를 썼는데, 사람들은 꿈에서 깨는 순간, 자기가 본 이미지들을 순식간에 편집해서 이야기로 만든대. 과학이 그렇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우리가 꿈을 이야기로 전달하면 그건 이미 우리가 꾼 꿈이 아닌 거지. 그래서 꿈과 꿈 전달이 어떻게 다른지를 정리해보고 싶었어. 애초에 메타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래서 엔솔로지에 글을 쓰거나, 여러 작가들에게 한 가지 주제로 산문 써달라고 하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아 나랑 같이 실리면 작가들 손해인데. 아 불쌍하다. 그런 특집이 오면, 남들이 어떻게 쓸지 계속 상상해. 그리고 사람들이 절대로 쓰지 않을 글을 상상하거든. 아니면 기획 자체를 뒤집어버리거나. 내가 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생기를 빼앗는 방식으로 원고를 쓰거든. 그래서 내가 먼저 사람들하고 뭘 같이 하려고 안하거든. 내가 다 죽이는 게 싫어. 그래도 우리 모임은 좋아 <안 죽고 싶은 모임 어때요?>는 너무 좋아.     

문 : 왜 나는 돼? 너랑 같이 쓰면 내 글도 생기 없어질 것 같지 않아?


김 : 안 없어져.     

문 : 그럼 우리 우리의 모임이랑 계획한 프로젝트에 대해 말해보자.              


                 

                                                4. 피자의 사탑에서 (예고편)     

     

                안 죽고 싶은 모임 어때요 : 김승일과 문보영이 안 죽고 싶어서 꾸린 모임

                             피자의 사탑 : 김승일과 문보영이 계획하는 프로젝트의 명칭          


                        피자의 사탑에 관해 문보영이 쓴 시


                           피자의 사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자는 늘 누워지내고

                      누워 있는 존재는 넘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자의 사탑에 관해 김승일이 쓴 시     



                            저는 사탑보다 피자가 좋고

                      피자의 사탑보다 피자가 좋아요

                           지난주엔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쉼보르스카 글을 읽어주었습니다

                        이사람 저번에 죽었단다

                        그 사람 시중에 이런 시가 있어

                    뭐보다는 뭐가 좋고 뭐보다는 뭐가 좋고

                               이렇게 계속

               뭐가 뭐보다 좋은지를 말해주는 시, 나는          

                      

                                               -끝-(계속)                                                       




#김승일 #에듀케이션 #문보영 #책기둥 #피자의사탑 #안죽고싶은모임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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