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연 Oct 27. 2024

사랑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날 울리는 한 문장

집 밖을 나서기 전 최종적으로 가져갈 짐을 확인하는 그에게 묻는다. “베란다에 쌓인 책들은 어떻게 할 거야?” 돌아오는 답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니가 좀 치워주라.”


한국이 싫어서,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일하며 연결된 사람들과 단절되고 싶어서 해외 정착을 준비 중이었기에 비자를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서류 작업이 많다며 나보러 자기

짐을 치워달라 한다. 나는 빈정이 상한다. 자취방에서부터 신혼집으로 데려온 책더미들. 두 번째 집으로 이사하기까지 그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은 눈길조차 두지 않고 그저 쌓아두기만 한다.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읽지 않는 책을 치우라고 하자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했다. 방이건 베란다가 됐건 책더미는 구석진 곳에 자리만 차지한 채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안그래도 꼴보기 싫은 책이었는데 그는 떠나가는 마당에 자기가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책정리까지 나에게 맡긴다. 뒷정리를 부탁한다며 잘 치워주리라 믿겠다며 무거운 짐을 맡긴다. 나는 왜 내가 니 물건들까지 치워야 하냐며 울분을 토한다. 그의 동공은 축 처진 채 좌우로 바삐 흔들리며 막차 시간을 놓칠 세라 뛰어가는 사람처럼 마지막 부탁이라며 자기 부탁을 들어달라고 한다. 한국 밖으로 나가기 위해 갖춰야 하는 증빙서류가 많기에 제한된 시간 안에 움직이려면 1분 1초가 아깝다며 울먹인다.


5년가량 고시촌에서 나랏일을 하기 위해 시험 준비를 하면서 봤던 책들이 베란다 구석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정치학, 경제학, 행정학, 연도별로 업데이트된다던 행정용어 사전. 독서가 유일한 취미여서 책 읽는 시간이 제일 좋다던 그가 아끼며 여러 번 읽었던 책이 군데군데 보인다. 당연히 붙을 거라 자신했던 마지막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이후로 자신의 미래 계획엔 없던 일을 하게 되면서 고시 공부하던 책은 버릴 줄 알았는데 그 책들은 서울시 관악구에서, 마포구로, 구로구에서 서대문구까지 집구석 어딘가에 말 그대로 처 박혀있었다. 방바닥이든 베란다 바닥이든 어디에나 묵직한 존재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책에 대한 혐오감이 커졌다. 시험에서 떨어진 이후에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은 책들을 소중한 재산인양 탑처럼 쌓아 올리곤 먼지가 내려앉아 책 제목이 흐릿해질 때까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도대체 그는 왜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지 않았을까? 나 같으면 강의실에서, 독서실에서, 고시촌 원룸에서 폐쇄공포증까지 안겨준 고시생활을 지워버리려 문제집이든 책이든 사전이든 죄다 갖다 버렸을 텐데. 여전히 나랏일을 하겠다는 미련이 남은 건지 물었을 때 아니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자신의 모든 걸 바쳤던 기념비적인 책이어서 버리지 못하는 건지, 그의 심리를 도통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을 볼 때면 심통이 났다.

 

하루는 그가 떠난 빈 집에서 날을 잡아 베란다에 묵힌 책들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책을 옮겨 실으며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국제정치의 이해, 등 책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파왔다. 책 사이사이에는 그의 노트가 끼여있었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정갈하게 필기해 둔 노트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그러게, 붙지 그랬어. 합격하지 그랬어. 하나마나한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뒤적이는 동안 핑크빛 커버가 달린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의 일기를 훔쳐봤다. 그가 쓴 그의 속내는 버젓이 드러나있어서 이걸 내가 봐도 되나 겸연쩍었다. 과연 나에 관한 문장도 있을까? 기대하며 조심스레 살핀다. 그러다 한 문장을 발견했다.

 

20(   )년 (  )월 (  )일.  

사랑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마도 그날은 그와 첫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어제처럼 선명했던 기억이었기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샘이 고장 나서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 마냥 한 번 시작된 눈물 줄기는 멈추지 않았다. 처치 곤란이었다. 그러길래 왜 그랬어. 사랑이 어김없이 찾아왔으면 끝까지 나를 책임졌어야지. 원망하며 울부짖어도 듣는 이가 없어 아무 소용없었다. 사랑은 어김없이 떠나갔다. 어김없이 찾아온 사랑이 어김없이 떠나갔다.



가수: 백아연 feat. 영케이

노래: 이럴거면 그러지 말지

https://youtu.be/x815A21RIto?feature=shar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