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애호가 코스프레

커피 헤이터의 어설픈 현질 후기

by Mind Opener

나는 분명하게도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진한 검갈색 액체를 바라보고 있으면 결코 좋아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심지어 다양하게 개발된 커피와 혼합된 음료들을 봐도 기분 좋지 않다. 단순히 내 돈을 빼앗서 가려는 고부가가치 상품이라서가 아니다. 쓴 한약을 먹이기 위해 어머니가 협상카드로 제시하던 사탕 패키지처럼 보여서 그렇다. 쓰디쓴 검은 것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남아 있지만, 사탕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뭔가 억울하고 분한 느낌이 나는 커피를 굳이 좋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때로는 아주 자주 커피를 마신다. 사실 나에게 커피는 그저 핫식스, 레드불과 같은 에너지드링크와 기능을 공유하는 카페인 음료일 뿐이다. 하지만 약으로 보면 이만한 것도 없다. 40이 넘은 약해진 정신과 육체로는 더 이상 이기기 힘들었던 나른함 등도 그럭저럭 잘 해결해 준다. 게다가 약에나 의지하는 나약한 놈이라는 손가락질도 쉽게 회피가 가능하다. 1년에 한 사람당 400잔 이상 커피를 소비하는 나라의 일원이기에 기호음료의 이유를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커피 애호가라는 더 고급진 핑곗거리도 있지만 요즘 세상에 어설픈 코프스레는 위험한 법이다.


커피는 원두의 종류와 지배지역, 가공방법이나 로스팅 정도, 추출방법과 시간 등 갖가지 변수의 조합이 생각보다 무시무시하다. 설익은 마음으로 가상 애호가 타이틀이라도 도전하기가 쉽지가 않다. 와인도 적당한 도수에 기분 좋은 단맛이 최고라는 남다르며 확고한 기준을 가진 내가 커피가 가지는 수많은 변주를 머리로라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그래도 체험은 해봐야기에 몇 가지 현질을 결정한다. (호기심이라는 녀셕이 항상 문제다.) 눈에 들어오는 원두들을 주문하고 유튜브에서 처음 보는 전문가가 추천하는 그라인더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나의 귀찮음을 해소해 줄 자동 드립메이커도 당근을 통해 급하게 조달했다. 꽤 오랜만에 부지런을 떨었다.


커피 원두는 생각보다 번들번들했다. 로스팅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변화 때문에 커피 표면에 기름이 나타나서 그렇단다. 원두들이 매끄럽게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생각보다 듣기 좋았다. 자동이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수동 그라인더에 원두를 담고 무심하게 손잡이를 돌린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선택한 적당한 갈림정도에 손을 맡기기 시작하면 번잡한 생각들이 사라진다. 귀찮음을 대가로 지불한 것치고는 괜찮은 베니핏이다. 시작과 끝에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드립메이커는 이후의 공부와 수고를 덜어준다. 단지 필터에 갈아낸 커피를 계량스푼으로 담아내고 물을 담아 버튼을 누르면 끝이다. 맛은 모르겠지만 향기는 합격점을 줄만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적당히 먹을만한 커피가 완성이 되면 보온병에 담아 집을 나선다. '어느 집 커피라'는 질문에 홈메이드라는 답변을 하면, 특별한 설명을 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커피 애호가라는 칭호가 붙는다. 여전히 커피를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다시 내일의 커피를 위해 적당한 귀찮음을 감수하기로 했다. 나에게는 필요 없는 날이 많아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또 누군가가 좋아해 준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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