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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Feb 01. 2020

광종에 대한 비판을 통해 본 최승로의 제왕관

<고려사 최승로 열전>을 읽고

  최승로 열전의 대부분은 그가 성종에게 올린 상서문으로 채워져 있다. 이 상서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5조정적평과 시무 28조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5조정적평 중 광종에 대한 기술의 태반이 강도 높은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종의 치세와 그에 대한 최승로의 비판을 살펴봄으로써 최승로가 그렸던 제왕관을 찾아보았다.

사극에서 광종의 역을 맡은 배우들([제국의 아침]의 김상중,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장혁, [보보경심]의 이준기)



광종의 정책

  광종은 고려의 건국과 통일에 힘을 쏟았던 호족 출신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왕권을 회복코자 하였다. 국초의 공역자에게 곡식을 하사하는 등 초기의 정책은 온건책에 가까웠으나, 광종 7년 노비안검법을 통해 본격적인 왕권 강화 정책을 개시하였다.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본래 양인이었던 자를 해방시켰던 이 법은, 공신들의 경제적·군사적 세력 기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9년에는 쌍기의 권유로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과거제는 본래의 기득권 세력이던 무훈 공신의 약화와 충성심 높은 신진 인사 기용을 통한 왕권 강화의 결과를 낳았다. 11년 백관의 공복을 제정한 것은 왕 중심의 위계질서를 확인하고 그 상하관계를 엄정히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광종은 이러한 정책을 통해 왕권을 크게 신장시켰고, 실질적인 군제 개혁과 시위군의 증강을 통해 그 반발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최승로는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말년에 이르러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노예가 상전을 논박하게 되니 상하의 마음이 서로 이탈되고 군신(君臣)이 한 몸 같이 되지 못했다’ 고 논박하였다.



광종의 개혁을 주도한 세력

  최승로는 ‘재주 없는 자’, ‘남북의 용렬한 자’, ‘후배(後生)’들을 등용하는 까닭에 ‘덕망 있고 노성한 신하들이 쇠락하였다’는 식으로 광종의 인사에 대한 비판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남북의 용렬한 자’, ‘후배’라는 것은 쌍기와 같은 (중국) 귀화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광종은 그들을 우대하여 개혁을 주도하였다. 여기에 과거를 통해 등용된 신진 세력들, 대호족과 입장이 달랐던 군소 토호들이 참여했다. 호족 출신의 공신들에 비해 자체적 기반이 약했던 이들은 왕권에 의지하였고 광종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최승로는 쌍기 등 귀화인들의 등용과 그들의 빠른 승진에 대해 ‘중국의 선비는 대우하여도 중국의 현명한 인재는 쓰지 못했다’고 평가하였으며, 쌍기의 등용 전후를 대비하여 이때부터 광종의 실정이 시작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최승로의 건의문 시무 28조에 언급된 역대 왕들에 대한 치적 평가. 광종이 최악의 평가를 얻었다.(출처: 우리역사넷)


  광종은 불교를 가까이하였는데, 단순한 불심의 발로를 뛰어넘는 적극적인 왕권강화의 차원이었다. 승려 균여의 ‘성상융회(性相融會)*’ 사상은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반이기도 했다. 유교적 정치 이념을 실현코자 했던 최승로에게 있어 광종의 친불정책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는 불교에 심취했던 왕을 가리켜 ‘재물을 탕진’하고 ‘스스로 임금의 존엄성을 상실’ 하였다고 적었다.



  최승로의 제왕관

  최승로는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국가를 꿈꾸었으나, 그것은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이었을 뿐, 광종과 같은 전제군주의 출현에는 극력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시무 제3조에서 시위 군졸의 축소를 역설하고, 제14조에서 왕에게 ‘예의로 신하를 대우’하며 ‘아랫사람을 접할 적에 공손히’ 할 것을 요구한 것을 보면 참된 군왕의 상에 대한 최승로의 생각이 보다 확실해진다. 최승로는 광종의 치세 동안 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대해 깊이 우려하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한 시도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성종에게 전제적 군주가 아니라 신하들을 예우하고 그들의 의견을 깊이 수용하며 넓은 포섭력을 가진 유교적 군왕이 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까닭이다.




*성상융회(性相融會)

  당시 양립하던 화엄사상 속에 법상종의 사상을 융합하여 교파 간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통합사상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당시 중소 호족이나 평민들이 신봉하던 화엄종과 법상종의 융회를 이루어 대중적 지지를 얻음으로써 대호족의 불교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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