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우리는 한 무더기의 걱정을 어깨에 짊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원치 않았지만 어느 날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에 무심코 문을 열게 되면, 걱정의 무더기는 열린 문틈으로 날쌔게 들어와 어깨에 올라탄다. 아뿔싸 싶지만 달리 어찌할 방도를 춪지 못하고는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어깨에 있는 그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이때 삶의 체중계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걱정 무더기'의 양상은 때때로 달라 그저 내 한 몸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정신의 문제이기도 하며,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대개 타인들과 섞여 살아가는 상황에서 발생하곤 한다. 그것은 때로 천재지변이거나 인공 지변이기도 하다. 공통된 것은 그것들이 어깨를 짓누르는 물리적인 확실한 무게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결코 형이상학적인 무게가 아니다. 걱정의 무더기라는 것이 특정한 공기와 함께 움직이며 물리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서 우리의 몸과 정신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걱정 무더기의 무게에 함몰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아니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것들은 나타난다. 걱정에 대한 집중력의 정도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진해서 다른 일상의 일들을 해나가면서도 문득 고개를 들면 여전히 거기에 버티고 있다.
하지만 와중에도 다행스러운 일은,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고 열역학 법칙이 있는 것처럼 '걱정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무엇인가를 숨 막힐 듯이 걱정하고 걱정하며 헤비급 걱정 무더기에서 헤롱 거리는 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 역설적으로 생각지도 않게 걱정 무더기는 분명 줄어든다. 이것은 문제 자체의 해결과는 별도로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작용이다. 인간의 몸속에서 면역반응이 일어나는 것과도 비슷한데, 하도 걱정을 하다 보니 그에 대한 면역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게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인가?
-상황이 막상 닥치면 그때 가서 다시 해결책을 찾아보는 걸로 할까.
-충분히 걱정했다, 이제 이 걱정은 그만하기로 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소리가 마음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면 오케이다. 걱정 무더기가 다이어트되고 있다는 신호다. 아마도 지금까지 했던 걱정들은 새로운 걱정에 의해 자리를 비켜주거나 망각곡선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해결되거나 하는 최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데일 카네기는 말했다. 그러므로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이니 그것들의 실체는 오직 마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걱정할 거리가 있다면 - 충분히, 충분히, 지나치다 싶게, 지겨워질 정도로 걱정을 해두자. 그것이 포개어지고 포개어지면 어느 순간 걱정의 무더기가 작아져있음을 느낄 것이다. 여러 색깔의 빛들이 중첩되면 흰색이 되듯 걱정의 색도 바래고 그 농도도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것을 아마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인즉, 모든 걱정의 총량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어서 그 총량을 넘어서는 순간까지 버티면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오히려 줄어드는 법이다. 나는 이것을 '걱정 총량의 법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여러 번 이 걱정 총량의 법칙의 혜택을 누렸다. 지겹도록 걱정한 '그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걱정이라는 손님이 찾아와도 '안 사요' 하며 돌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