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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Nov 20. 2021

우리에겐 때로 '식'이 필요하다


살아가며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의건 타의건 어떠한 '식'을 겪게(혹은 식에 휘말리게) 된다. 입학식, 졸업식, 결혼식, 장례식,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일 년에 한 번씩 치르는 생일도 일종의 '식'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가정마다, 그리고 각 종교마다 상황에 맞는 다양한 의식들이 있다.



때로 그 의식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귀찮고 까다로우며 그야말로 형식적이고, 지나치게 과하거나 부담스럽다. 게다가 모든 식들은 많든 적든 돈이 든다. '식'을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준비 과정에서 기가 질려 굳이 이런 것들을 해야 하나 싶은 자괴감도 든다. 실제로 생략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길고 오랜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그 귀찮고 까다로운 '식'들을 꾸역꾸역 치러온 것은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예컨대 '결혼식'이라는 인류의 오랜 의식은 세상 수많은 여성과 남성들 중에서 이제 누구도 바라보지 않고 '당신만'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자신의 마음속에, 두뇌 속에 심는 ''이다. (실제로 서약이 지켜지는가와는 별개) 결혼식이라는 꽤나  자금과 만만치 않은 품이 들어가는 의식은 오직 결혼하는   사람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식의 절차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당사자의 마음에 '결혼의식을 치르고 있구나' 각인되기 때문에 어쩌면 더욱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인류 보편 의식인 '장례식'은 사실 '떠나간 사람'이 아닌 '떠나보내는 사람'을 위한 의식이다. 남겨진 이들에게 사랑하는 그 존재를 떠나보낼 마음이 미처 준비되지 않았을 그때 '의식'을 치름으로써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애써 끌어당겨 그 형식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상실의 마음이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겠지만 이별의 의식을 치르는 것과 그렇지 않을 때의 정신적 충격의 크기는 분명 다르다.



우리는 장례식을 치르며 눈물이 마를 만큼 많이 울고, 그 죽음이라는 상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떠나간 사람에 대해 곱씹으며 그 의식을 몸으로 삼켜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존재가 없는 채로 남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특정한 상황을 각인시키는 것, 메타인지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도록 돕는 것. 그것이 각종 의식이 존재하는 이유 아닐까 한다. 생일 역시도 작게나마 의식을 치름으로써 - 예를 들면 미역국을 먹고, 케이크의 촛불의 불을 끄는 등의 행위 - 자신의 새로운 나이를 '인식'하게 된다. 어린아이일수록 일 년, 일 년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 의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매년 치르는 의식으로 우리는 나이를 각인한다 by 해처럼



사회가 변화하고 가정의 모습들이 변화되고 있기에 꼭 필요한 의식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새롭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의식은 '이혼식'이 아닐까 한다. 부부였던 두 사람뿐이라면 '서류와 도장'만으로도 이혼의 의식은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있을 경우 이혼식은 아이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 같이 모일 것 까지는 없겠지만 한 번은 엄마와 함께, 또 한 번은 아빠와 함께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 같은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너의 탓이 아니라고 설명해주는 것이다. 기억될 만한 무엇인가를 함께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아이로서는 슬픈 경험이겠지만,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것을 찾도록 같이 애써보는 것이다. 뚝- 준비도 없이 전화가 무참히 끊어지듯이 어느 한쪽의

부모가 부재 상태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일까. 물론 겪지 않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다만 모든 의식들은 떠들썩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식'이든 비중은 '당사자'에 두어야 한다. 식은 당사자를 위한 것이므로.



나에게도 스스로 고안한 작은 '식'들이 있다. 그중 한 가지를 소개하자면 봄이 오면 과일로는 딸기만 먹고, 여름이 왔구나 싶으면 수박만 잔뜩 먹는다. 가을이면 감을 먹고, 겨울이면 귤만 먹는... 계절을 인식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그 해의 첫 딸기와 첫 수박과 첫 감과 첫 귤을 먹을 때가 '식'을 시작하는 최초 시점이다. 얼마 전 첫 귤을 먹으며 아, 겨울의 시작인가를 여느 해처럼 느꼈다. 그와 동시에 겨울용 실내 슬리퍼를 새로 사고 깊이 넣어두었던 전기 카펫을 꺼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을 나는 '계절 의식'이라 부르고 있다.



모든 본질적인 것들은 결국 마음과 생각의 일들이지만 그것들을 담기 위해 '식'들이 필요하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 때 하게 되는 일련의 루틴도 식의 일종이라고 본다. 그러니 우리들의 삶은 자잘하거나 혹은 방대한 의식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고, 우리에겐 상황에 맞는 '식'이 필요하다. 결국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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