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처럼 Dec 25. 2021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은 물건이 아닌 기억이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제껏 살아오면서 보냈던 지난 크리스마스 즈음의 날들이 생각나곤 한다.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사람들, 그 순간순간들마다 몸 담았던 사람들과 장소가 그 시간들에 담겨있다. 시간은 지나갔으나 시간의 기억들은 가만히 고여 있다.


​​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사회인이 되었을 때 몸 담았던 직장은 지금은 KTV라고 불리는, 과거에는 '국립영상제작소'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방송국이었다. 말하자면 정부 직속 홍보 방송국이었다고 하면 되려나. 보다 훨씬 이전에는, 영화관에서 불이 꺼지고 본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어김없이 나왔다고 하는 <대한뉘우스>를 만들던 곳이었다. 사실은 그런 정부 직속 홍보물을 만드는 방송국 따윈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락물과 연예인이 난무하는 그런 곳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그 방송국의 전신은 '국가 홍보 영상'을 만드는 곳이었고, 다양한 정부를 거치며 그 정부의 입맛에 맞는 홍보물을 제작해왔을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던 피디들은 피디가 아니라 '감독'이라 불렸던 분들이 많았다. 게다가 몇십 년간 영화 필름- 시네마 천국에 나오는 추억의 영화 필름 말이다 -으로 제작해오던 분들이라 편집기를 다룰 줄 모르는 분들도 종종 있었다. 방송국에서 피디가 '편집기를 다루지 못한다'라는 뜻은 사실을 말하자면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극적으로 말하면 그만둬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처음 방송국에서 스크립터로 일을 시작했을 때 만났던 피디님은 피디가 아니고 끝까지 감독님이었다. 첫인상은 '이분은 기인인가' 싶을 만큼 도인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뭔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 같은 분이셨다. 그랬다. 최 감독님은 편집기를 다루지 못했다. 우리 팀은 최 감독님과 나랑 동갑 친구인 어시스턴트 디렉터 - 에이디 한 명, 멀리 대전에 살고 있어서 매번 팩스로만 띡~ 원고만 달랑 보내던 메인 작가, 그리고 보조 작가인 나. 이렇게 넷 뿐이었다.


우리가 하던 프로그램은 과거 제작된 수많은 '대한뉴스' 영상 자료들 중에서 매번 주제를 정해 자료들을 편집하고 패널과 함께 추억 이야기를 하는 컨셉이었다. 모든 자료조사와 섭외, 촬영, 녹음, 편집은 나와 에이디인 친구 둘이서 다 했다. 기억나던 패널로는 예쁜 할머니였던 사미자 님, 곱고 멋진 노신사셨던 고 현인 선생님, 딱 붙는 청바지가 부담스러웠던 고 트위스트 김 님, 박목월 시인의 아드님 되시는 박동규 교수, 먼 나라 이웃나라의 이원복 교수... 그런 분들이 인상에 깊이 남아있다.



방송 준비부터 녹화까지 최 감독님이 하는 일은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녹화 현장에 감독님이 계시면 방해가 된다는 느낌조차 받았던 것 같다. 녹화 때마다 옆 프로그램 피디들이 와서 도와주곤 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최악이었네 싶은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모든 상황상황들이 정말 재미있었다. 최 감독님이 하시던 유일한 일이라면 나랑 에이디 점심 챙겨주시는 거였다. 정말 점심은 제대로 정확히 잘 챙겨주셨다. 그러고는 홀연히 사라지시곤 했다.


나랑 동갑인 에이디는 포항 출신의 괄괄한 아가씨였는데 우리는 죽이 잘 맞아서 일에 치이면서도 무척 재미있게 지냈다. 가끔은 점심을 먹고 노곤하면 근처 비디오방에서 지루한 영화를 하나 틀어놓고는 두어 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근처 만화방 -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선릉역 부근에 비디오방, 만화방이 몇 개 있었다 - 에 가면 젊은 피디들이 컷 연구를 한다며 죽치고 있는 모습도 종종 목격되었다. 시청률에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정부 홍보 방송을 만드는 피디들의 삶이란 그런 거였다. 어쨌든 방송이 나가기만 하면 된다. 보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준공무원이라 잘릴 염려는 없다.


​​


하지만 최 감독님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편집기를 다룰 줄 모르는 피디였으니까. 언젠가 한 번은 내가 어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정치인을 섭외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한심한 당 출신) 시간 착오가 조금 생겨 그분이 좀 긴 시간을 대기하게 되었다. 나도 다른 일에 너무 바빠서 그분을 못 챙겼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 엄청나게 화를 내며 그냥 가버렸다. 다음 날 그 사람은 방송국 제일 윗선에 거세게 항의를 한 모양인지 최 감독님은 징계를 먹게 되었다. 그 징계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는지 어쨌는지 최 감독님은 정말로 하루 종일 상사가 바로 마주 보이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그냥 가만히 앉아만 계셨다.........


그 사람이 얼마나 거물급이었는지는 나도 잘 알 수 없고, 섭외를 한 것도 그런 대우(?)를 한 것도 나였는데 최 감독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은 지독하게 괴로운 일이었다. 일주일이었는지 한 달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괴로운 그 시기는 지나갔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왔다. 나는 죄송하다고 최 감독님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는데 감독님은 늘 그러셨듯 아니라고 하시며 허허허허 웃으시기만 했다. ㅜㅜ


크리스마스 이브였나, 이브의 이브였나 여하튼 세상이 들떠있던 어느 , 역시나 제대로 점심을 챙겨주신  감독님은 우리를 근처 대형 쇼핑몰로 다시 부르셨는데 쇼핑몰 앞에 도착하니 감독님의 양손에는 커다란 케이크 상자가 하나씩 있었다. 가족들이랑 같이 먹으라며 크리스마스  보내라고 하시는  얼굴은 역시 어린애처럼(ㅜㅜ 진짜 해맑게) 웃고 계셨다. , 이분은 대체,  이런 얼굴을 가진 천사가  있어.... 그런 생각을  수밖에 없었다. 명절(크리스마스도 명절은 명절)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선물을 하는 거라고만 생각해왔었는데 감독님은 다른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게다가 나는 매우 이상하게도 크리스천이긴 했지만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먹는다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촌스럽게도 그때 처음 알게  것이다.


​​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 나는 다른 방송국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최 감독님도, 친구 에이디도 어쩌다 보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후에 바람결에 들린 소식이라면 최 감독님은 회사를 사직하셨고 아이가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 인생이 결국 해피엔딩이 되었을지 그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크리스마스에 즈음하면 감독님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난다. 그 케이크와 함께. 그리고 어디에 계시건 평안하시기를 작게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


돌아보면 그곳의 시간들은 짧은 꿈을 꾼 것 마냥 어쩐지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경쟁도 없었고 시기와 질투도 없었으며 성공을 향한 투지 같은 것도 제거되어 있는 장소였다. 어둑어둑한 편집실에서 1970년대와 80년대의 대한민국을 그 '대한뉘우스' 비디오테이프 속에서 질리도록 만났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사이즈의 방송국 구석구석은 보물 찾기처럼 흥미로운 장소였다. 명동으로 거리 인터뷰 따러가는 차 안은 엠티 가는 느낌으로 즐거웠다. 거리 인터뷰 딸 만한 사람이 없을 때는 내가 행인인 척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후에 몸 담은 어떤 방송국에서도 그 같은 분위기의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곳은 내게 대학과 진짜 사회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는 완충지대 같은 장소가 아니었을까 한다. 뜻밖의, 기대하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지금 그 사람들과 장소는 내게 그렇게 남아있다.


​​

Illustrated by 해처럼



어찌 보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은 물건이 아닌 그 물건이 담고 가게 될 기억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기억나는 나의 크리스마스 선물 또한 '최 감독님의 케이크'인 이유는 예상치도 못한 딱 한 번의 기억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록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급에는 못 미치더라도.


메리 크리스마스!

매거진의 이전글 떠올리면 견뎌낼 수 있는 풍경, 당신은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