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서점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막 일본에서 살기 시작하여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하던 시절에도 시간이 된다 싶으면 서점에 들렀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먹이를 찾는 곰처럼 허기진 채 수많은 서점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일본어라면 거의 까막눈에 가까운 내게 세로 쓰기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일본책들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래서 글보다는 그림의 비중이 더 많은 그림책이나 동화, 패션과 요리 등을 다루는 잡지를 주로 읽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며 일본어 어휘가 아주 조금 늘어나면서 에세이 코너까지 영역을 넓혔고, 꽂혀있는 책들의 타이틀을 훑어보는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라이프스타일 코너에는 대략 30대부터 50대 사이의 여성들을 겨냥한 에세이들이 약간씩 주제를 달리 한 채 다양하게 출간되어 있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들], [센스 입문] 같은 류의, 취향에 딱 맞는 제목을 가진 책들이 감각적인 사진과 그럴듯한 표지를 하고서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별생각 없이 라이프 분야 에세이 코너에 꽂혀있는 책들을 훑어보며 또 어떤 새로운 책들이 나왔을까 두리번거리던 날이었다. 서가 귀퉁이에서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에세이스트처럼 산다’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에세이스트처럼 산다? 어쩐지 심장 안쪽이 근질근질하고 손끝이 아릿한 듯했다. 책을 집어 들고 목차와 서문을 읽었다. 서문을 요약하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 온난화, 빈부격차, 뉴 테크놀로지, 새로운 감염병 등으로 우리는 불안하다. 하지만 하루하루 나름대로의 즐거움과 보람도 있다. 이런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하나의 선택지로서 에세이스트처럼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오,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이잖아. 매일 터져 나오는 불안한 소식들에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또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걷다 보면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에 감탄하고, 빛깔과 높이를 달리하는 하늘에, 새로 발견한 작은 카페의 아기자기함에 기쁨을 느낀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새 책과 긴 시간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읽힌 옛 작가들의 보석 같은 언어들을 발견하는 환희는 또한 참으로 크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주위를 스쳐가다가 그중 일부가 내 마음에 기대어 오면 그것들을 모아 글이라는 형태로 반죽하여 저장하는 행위. 이런 저장물들을 에세이라 부른다면 오래전부터 해오던 나의 즐거운 취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에세이스트처럼 살아보면 어때? 하며 슬쩍 말을 건넨 현역 에세이스트인 저자는 치유로서의 글쓰기 같은 개념이 아니라 삶 자체를 ‘쓰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보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에세이스트처럼 산다는 건 글을 쓰는 직업인이 되라는 게 아니라, 매일을 기록하고 사유하며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표현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일상의 순간들을 마주하며 느낀 소소한 것들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며 살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야겠다! 나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언젠가 듣고 소중히 킵해두었던 소설가 윤후명 님의 말을 떠올렸다.
-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가 있는 줄 압니다. 사실 ‘나’는 없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써야 그게 내가 되는 것입니다. 씀으로 인해 그 ‘나’가 되는 것이에요.
이름을 불러야 꽃이 되고, 무언가를 써야 자신이 되는 거라면 유형과 무형의 것들에 끊임없이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에 대해 기록해 나갈 때 겨우 나라는 한 존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즐거움일지도.
언제나 무언가를 끄적이며 살아왔던 것 같다. 학교의 방학 내내 책상 앞에 붙어 앉아 하루 종일 일기를 쓰며 희열을 느꼈던 기억도 아련하다. 감정의 폭풍에 휩쓸릴 때마다 나를 구제해 준 것은 역시 ‘쓰기’였다. 쓰다 보면 생각이 한 겹 더 깊어지는 경험을 했다. 쓰다 보면 엉켜있던 것들이 풀리면서 각각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지난 20여 년 도쿄에서 여행자와 생활인을 오가며 살아오는 이야기를 나의 언어로 쓰자는 생각이 든 건 에세이스트처럼 살라는 말의 파동이 마음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 파동이 나를 지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모든 인생은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의 총체이고, 우리 모두는 이미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자칭 에세이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쓰기 시작하세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수도꼭지를 틀기 전까지는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 루이스 라무어(Louis L'Am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