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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Jan 19. 2020

나만을 위한 인형


왜 그렇게 인형을 좋아했던 걸까. 어린 시절의 나는 늘 인형을 필요로 했다. 외동은 아니었지만 혼자 노는 것이 좋았고, 주로 인형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지어내며 놀았다. 무엇을 갖고 싶어 하면 뭐든 다 사주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는 아니었기에 끔찍이도 좋아했던 몇몇 인형들은 머릿속의 상자에 잘 보관되어 있다.



이를테면 종이 인형놀이도 무척 좋아했다. 시중에 파는 종이인형 놀이 세트뿐 아니라 딱히 마음에 드는 시판 제품이 없으면 종이에 직접 그림을 그려 오려내서 놀았다. 마론 인형이라고 불리던 바비 인형도 있었는데 '마론'을 잘못 알아듣고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그것을 '마른’ 인형이라고 생각했었다. 몸이 많이 말라서 마른 인형인가 보다 어린 마음에 그리 짐작했지 뭔가.



유치원생 시절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인형은 '인생 인형'이다. 사진도 전혀 남아있지 않고 오직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 인형은 약 20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예쁜 금발 머리 여자아이 인형이었는데 그 인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누우면 눈을 꼬옥 감고, 세우면 번쩍 눈을 뜨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형이었다. 그 인형을 품에 안을 때마다 느꼈던 것은 ‘엄마가 나를 정말 예뻐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으니, 자식에게 있어 부모의 사랑은 때로 하나의 물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그때 깨달은 바다. 철없는 자식들이 외치곤 하는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라는 식의 반항적 외침에는 역시 ‘물건’의 비중도 꽤 높지 않은가 말이다.



여하튼 이름도 붙여주지 못했던 그 인형을 닳고 닳을 때까지 갖고 놀았다. 나중에는 옷도 다 사라져 발가 벗겨진 상태였고 인형 발바닥에 구멍이 나기까지 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여 참고 참다가 결국 머리와 몸을 분리해 본 적이 있었는데, 머리통 속을 들여다보니 눈이 있는 부분에 아주 커다랗고 둥그런 장치가 달려 있어 기겁을 하고 황급히 몸에 다시 붙여 놓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인형은 '발명왕 에디슨'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에디슨이 하도 바빠 딸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는 미안함에 딸들을 위해 만들어 주었던 것이 그 시초라고! 에디슨은 이 인형 외에도 자동으로 노래를 하는 인형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상상해보면 약간 으스스하기도 하다.



마치 동생이라도 되는 양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인형을 재우고 깨우고 하는 놀이를 지속하다 그것을 어딘가에 처박아둠과 동시에 기억의 저 너머로 보내 버린 후 - 마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빙봉처럼 - 인형에는 거의 제로라 할 만큼 아무런 관심이 가질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성인이 된 여성이 인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라이너스의 담요'를 떠올리게 된다. 어린아이가 인형에 애착을 갖게 되는 이유는 주 보호자인 엄마나 아빠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제2의 애착 대상으로 삼아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른바 '애착 인형'으로 불리는 영유아기의 인형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정서적 교감을 나눠 감정의 성장까지 돕는 역할을 해주는 물건이라고. 다만 어떠한 이유로든 그 '애착 인형'과 심리적으로 안정된 이별을 하지 못하게 되면 애착은 '집착'이 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인형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인형 뽑기 기계는 지금도 절찬리에 가동되는 것이겠고.






사실 인간이 인형에 대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애착의 감정은 그것이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만의 소유물이기를 원하는 감정 말이다. 그리하여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노라는 남편이 자신을 대등한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고 '인형'으로 보고 있다는데 절망하여 그 집을 뛰쳐나간 것이고, 반대로 카를로 로렌치니의 역대급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의 인형 피노키오는 헛된 꿈을 안고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갔다가 '착한 일'을 한 대가로 딱딱한 나무인형에서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인간 소년'이 된다. 그리고는 아마도 더 이상 가출하지 않고 아버지의 집에 머무는 착한 진짜 아이가 된다.



어린 내가 눈을 감고 뜨는 인형을 유달리 좋아했던 것은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눈은 나만을 향해 열렸고, 또한 내가 원할 때 나만을 위해 닫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나의 미성숙함은 그 절대적 소유를 통해 안정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결코 인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숙이라는 건 어쩌면 미련 없이 인형을 버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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