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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Nov 23. 2020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그 ‘불완전함’에 대하여

읽기의 자율주행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에 막 들어가서였다. 고등학교 동기 둘과 함께 독서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 첫 책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우리 셋은 대학도 각각, 전공도 각각이었는데 대학에 들어가 각자 학교에 다니느라 바빠 함께 만날 시간이 적어진 것이 못내 아쉬워 독서모임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다만 살고 있는 곳은 변함없이 같은 동네였기에 평일에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주말에는 카페에 모여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우리가 읽은 책들은 이 <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다이 호우잉의 책이라든가 이외수의 책이라든가 카프카라든가였으며, 누군가가 추천하고 두 명이 동의하면(일단 거론된 책은 뭐 당연히 나머지는 동의했지만) 각자 사서 읽곤 했다. 책들을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같이 읽고 생각을 나눈 그 시간들은 참으로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금도 셋 중 하나가 그 독서록을 보관하고 있고, 한번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한 지가 언젠데 감감무소식.




이 소설의 주인공들 -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 - 이 당시 막 열아홉, 스물이던 우리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이 소설의 내용이나 거기서 묘사된 그들의 삶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뭐 이렇게 개나 소나 아무 하고나 다 자?'가 가장 큰 충격이었고 어떤 소설에서도 읽지 못했던 그런 지나치게 성적인 묘사들이 거북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책이 말하고 있는 것들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일부는 우리에게 깊이 남았다.




조그만 소도시에서만 머물고 있던 나라는 존재가 큰 도시에서, 이러저러한 사람들과 뒤섞여 매일 버텨내야 하는 느낌으로 지내던 질풍노도(그러고 보니 나에게 질풍노도는 대학시절이었나)의 그 시기에 내 좌표를 어디에 설정해둬야 안전하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대학 내내 늘 품고 있었다. 그러다 하루키가 제시한 <상실의 시대>는 마침 그런 내가 딱 안착하기 좋은 스탠스였던 것이다. 그 ‘쿨함’을 쓰윽 빼내어 내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그럴듯하게 번역해 한국땅에 내놓은 그 자체는 마케팅적으로 엄청나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타였음이 분명하다. 아마 그런 제목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정보 없이 서점에서 선뜻 집어 들 수 있었을까. 비틀즈도 90년대의 우리에게는 멀고 또 낡은 것이었고, 노르웨이라는 국가도 북유럽 어딘가의 추운 나라에 (그때까지 나는 노르웨이=검은황소, 이런 이미지만 갖고 있었다, 어릴 적 읽은 세계명작동화집의 영향) 지나지 않았으며 숲이라고는 걸어본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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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었다. 20년이나 지나 다시 읽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처음 이것을 읽었던 감정이 너무 강렬하여 쭉 뇌의 어딘가에 문장들이 채워져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지런한 하루키 씨는 마라톤을 뛰듯 끝도 없이 새로운 소설들을 - 어찌 보면 변주곡에 지나지 않을지 모를 -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낡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왜 이 책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안다.


나오코와 와타나베



꽤 예전에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소설이 있었다. 어떤 영화감독 지망생이 어릴 때부터 수많은 영화들에 심취하여 그것들과 함께 성장해오다가 나중에 마지막으로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하는데, 거기에는 세상 모든 '괜찮은' 영화의 '괜찮은'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짜집기적인 요소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물론 시나리오를 쓴 작중 본인은 그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이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으며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키가 좋아했던 작가였던 데다, 정신병에 걸려 자살한 나오코는 <밤은 부드러워>의 니콜을, 미도리는 로즈메리를 연상시켰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만.



그런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감동하며 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대략적인 스토리 같은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20대의 나는 아직 그 하나하나가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들 누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저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체 그때 나는 뭘 읽고, 무엇에 대해 감동하고 있었단 말인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코가 울 때 나도 역시 눈물을 흘렸다. 이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불완전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이 소설이 쓰인 이유이고, 목적이고, 결론이었다. 불완전한 사람들 중에 일부는 자신을 둘러싼 불완전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불완전한 삶을 마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은 불완전한 채로 불완전한 생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많은 시간과 문장과 상념들을 들여 저자는 이야기해 둔 것이다.


와타나베와 미도리




사족.

2010년에 개봉한 영화 <노르웨이의 숲>의 관객 한줄평을 봤다. (영화 자체는 보지 못했고, 보고 싶지는 않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관람객 한줄평은 이거였다.



“나오코보다 미도리가 이쁘면 우짜노... “


ㅜㅜ 심히 공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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