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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Nov 20. 2020

페미니스트가 차린 <정치적인 식탁>

읽기의 자율주행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사전 의지도, 사전 욕망도 없이 제목 때문에 집어 든 책이었다. <정치적인 식탁>이라니 그 식탁이 어찌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든지... 페미니즘을 다룬 글들을 굳이 찾아서 읽지는 않지만 이렇게 그들이 먼저 다가올 때가 가끔 있다.




하나의 사상이 거부할 수 없는 절대선이 되어 다른 모든 형태의 것들을 집어삼키는 모양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난 때도 그랬을 것이고, 사회주의가 처음 태동하던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페미니즘이, 인권문제가, 에코이즘이 각자 최전선에 위치하여 많은 것들을 집어삼키고 있지 않나 싶다. 누가 인권문제에, 환경문제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동의 또한 누군가에게는 쉽지 않을지 모른다.



흑인 또는 여성 (그리고 그 밖의 소수자들)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피부 깊숙이 그 억울함이랄까, 차별이랄까 하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대놓고’ 이건 나빠, 말도 안 돼, 하는 방식보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이런 구구절절 설명하는 책도 당연히 필요는 하겠지. 저자가 말하는 수많은 비합리적인 여성 인권의 면면들에 대해 여태껏 살아온 동안 여자로 살아가는 스스로가 피부로 직접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운좋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혹은  둔감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간접체험 같은 것은 몇 번 - 책이나 대중매체, 들려오는 이야기 등을 통해 -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인 식탁>은 막연하게 부당하다는 것을 짐작은 하지만 그 실체는 정확히 알지 못했던 사안들을 하나씩 꼼꼼히 짚어주는 듯했다. 눈을 뜨고 봐 봐, 이렇다구, 이게 이 부당한 세상의 실체야. 뚜껑이 덮여있는 낡은 상자를 열어보는 느낌이었달까. 덮여있는 안쪽에 구더기가 기어가고 있을지도 모르고, 곰팡이가 가득 피어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용감한 누군가가 뚜껑을 활짝 열어 이것 보라고, 이렇게 더럽고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여전하다고, 같이 털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외치는 것. 그 외침을 가장 소리 높여하는 이들이 페미니스트고 에코이스트고 인권운동가인 것을.



오늘도 우리는 무언가를 먹고 마셨으며 먹고 마실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이든 어머니든 음식점 노동자든 누군가의 노동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곧 누군가를 살리는 힘이다. 저자는 부엌이 곧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이 생각나는 지점이었다) 식탁 위에는 우리들의 먹이가 된 동식물들이 얌전히 놓여있고, 그것이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그 매일의 식탁을 위해 분주한 것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다. 저자가 끌어와 차려놓은 정치적 식탁 위 여타의 많은 말들 중에서 ‘공존’이라는 단어가 깊이 남는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는 아마 그것, ‘공존’ 때문이겠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사회가 되기를, 공존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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