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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05. 2020

<소설가의 일> 마흔 넘은 당신이 미혹되어야 하는 이유

읽기의 자율주행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을 읽다. 작가의 [원더보이]를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다. (나는 늘 박민규와 김연수를 헷갈리곤 한다.) 소설가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의사가 수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직업의 세계인 거다. 커튼을 슬쩍 들추고 그 안에 가려져 있는 무언가를 엿보는 기분.




때때로 마음을 흔드는 문장들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진동이 꽤 길었기에 딸아이에게 소리 내어 읽어 주기도 했다. 좋은 문장이 나를 한번 통과해 나가는 것과 딸을 한 번 통과해간다는 것은 다른 의미일 수 있겠지만 그 순간을 깊이 아끼고 있다.


그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에서 아하, 했는데 이런 것이었다.


문화란 옷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왜 옷이라는 걸 입기 시작했을까? 무더운 여름에도 다들 옷을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추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뭔가를 가릴 목적이 더 강한 것이다. 뭘 가리려고 하는지는 다들 알겠지.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그걸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뭔가를 가리려고 옷을 입고, 그다음에는 옷이 그 뭔가를 가린다는 사실을 가리려고 의복을 발전시킨다. 즉 옷을 입는 일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되는 것이다. 이제 멋진 옷을 입은 사람을 봤을 때 그가 뭔가를 가리기 위해서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옷 그 자체가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이런 게 문화다.” (소설가의 일, 김연수)



옷뿐만이 아니다. 식기, 인테리어와 같은 모든 의식주 문화가 거기 다 해당한다. 작가가 왜 이런 비유를 했는고 하면 다음 문장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욕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에 그 욕망을 가리기 위해 짐짓 하는 말들이 바로 문학의 말들이다.”



그는 또한 문학을 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美文)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런 주옥같은 말들이 농담 섞인 고백들과 사담들과 뒤섞여 적혀있는 와중에 마흔의 나이를 넘어선 그가 불혹과 미혹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말들이 너무 아프게 심장을 찌른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렇게 말한다. 간절히 소망해도 온 우주는 나를 돕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꿈꾸는 대부분의 일들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혹하지 말자. "혹시나......"라고 말하지 말자. 다른 삶을 꿈꾸지 말고 이제 제정신으로 살아가자.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의문은 남는다. 그런 게 우주의 법칙이라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은 무슨 의미인가? 그들 역시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텐데 이런 무의미한 삶은 왜 이토록 흔한 것일까?

​우리에게 아직 미혹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소설가의 일, 김연수)



소싯적 이파리 한 줄기를 떼어다가 짝사랑하는 상대를 생각하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다 문득 '사랑하지 않는다'로 귀결되는 순간을 맞닥뜨리듯, 사십이 넘은 나 역시 알아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꿈꾸는 대부분의 일들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뤄지지 않는다. 이뤄지지 않는다...... 이제 다른 삶은 꿈꾸지 말고 제정신으로 살아가라, 즉... 정신 차려야 해라는 간곡한 메시지.


그러니까 미혹이라는 것은 희망이고, 불혹이라는 건 절망? 아니 그보다는 희망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사십이 넘으면 미혹되지 말라는 것은 희망을 갖지 말라는 뜻인 거였어... ('ㅁ')


하지만 그 후로 이어지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일본의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혹독함, 그러나 그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있던 사람들이 죽고 몇 백 년 후에야 그 믿음의 결과를 쥘 수 있었던 예화와 함께 다음 문장이 이어진다. 아이에게 읽어준 지점도 이것이었다.



고통과 절망은 우리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하지만 우리 인류는 충분히 오래  테니, 우리 모두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겠지만 우리가 간절히 소망했던 일들은 모두 이뤄지리라.”



“우리가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과 역사라는 무한한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과거의 빛과 미래의 빛이 뒤섞인 밤하늘처럼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면. 먼 훗날 어딘가 다른 곳이 아니라 지금 즉시 바로 여기에서. 마흔 살이 지난 뒤에도 우리가 미혹돼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소설가의 일, 김연수)



너 자신을 위한 욕망을 살지 말고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채 만나는 그날과 그 인류를 위해 욕망을 품고 마음껏 미혹되어 살아가라고. 너를 위한 욕망은 밀알이 되어 죽어, 희망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 열매의 맛을 내가 맛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생은 그런 거라고. 그게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작가의 묵직한 메시지였다.


김연수 씨는 그런 소설가였구나. 다음에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좀 더 진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미혹과 불혹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부끄러움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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