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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29. 2020

민감성 인간 고백기

소소하게


나는 정말이지 약이 잘 듣는 인간이다. 오랜 시간 나를 보아온 남편도 인정한 바다. 몸이 화학반응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보면 될까. 알코올도 몇 방울에 취해버리고 (진짜 몇 방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 감기약 같은 것도 먹으면 바로 반응이 온다. 때를 놓치지만 않고 초기에 얼른 먹으면 감기도 금방 낫는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닐지도) 뭔가 안 좋은 것이 몸에 들어가도 즉각 반응이 온다. 약의 부작용 같은 것에도 민감하며 뭔가 이상한 게 들어간 화장품은 얼굴에 바로 반응이 와서 아무거나 쓸 수가 없다. 나의 민감함은 까칠함과는 전혀 다르다. 민감한 인간이긴 한데, 까칠한 인간은 또 아니다. 그런 내가 완전히 적응한 물질이 있는데 그게 커피다. 커피는 아무리 밤늦게 마셔도 잠을 못 잔다거나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두통이 온다는 것 빼고는.



또 하나 고백할 것은, 나는 내 몸이 상할까 봐 벌벌 떠는 민감한 인간이기도 하다. '상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망가진다는 개념 혹은 낡아진다는 개념이라고 하면 될까. 내면이 아니라 외면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좀 몸을 사리는 서타일이다. 특히 얼굴과 손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다. 이상하게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손과 얼굴이 상하는 것이 참 싫더라. (이것도 누구나 그런 것인지 모른다)



손에 대해서는 좀 유별난 면이 있는데 설거지는 절대 맨손으로 하지 않고 피치 못하게 손에 물을 묻히면 바로 핸드크림이나 오일을 바른다. 요즘은 특히 더 자주 손을 씻고 소독해야 하는 시기다 보니 그만큼 더 많은 핸드크림을 바르게 된다. 뭐든 매일 닦고 정성을 들이다 보면 티가 나는 법인지라 내 손은 열세 살 딸 손보다 더 촉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딸은 누가 엄마 손을 보면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집안일 1도 안 하며 사는 사람인 줄 알겠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게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눈에 제일 잘 띄는 신체 부위가 손이라서 그런가. 손은 잘 돌봐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꽤 오래전부터.



 반면 발은 겨울이 되면 뒤꿈치가 까칠까칠해질 만큼 신경을 안 쓴다. 여름이 되어 샌들을 신어야 하는 시기가 오면 겨우 페디큐어 정도 바르고 발뒤꿈치에도 신경을 써주는 편. 그러고 보면 누군가의 눈에 비치는 부위에 민감한 건가. 한 뷰티 동영상에서 무릎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무릎을 꿇는 식으로는 절대 앉지 말라고 해서 화가 나려고 했다. 무릎에 주름 좀 지면 어때서?! 싶은 마음에. 하지만 그 사람도 내가 손을 소중히 여기듯 무릎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떨어진 낙엽을 보며 나무가 안되어 보이는 것처럼  누구든 자신의 신체부위의 낡음에 대해 마음 아파할 권리가 있다.


추리소설의 대가인 아가사 크리스티는 바람둥이 남편과의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이후 재혼을 했는데 두 번째 남편은 연하의 고고학자였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고학자라면 내가 늙어갈수록 더 사랑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와 결혼했다"라고 농담인 듯 진담처럼.





그녀의 판단은 적중하여 그들은 46년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했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과연 그렇구나 싶어 고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체 어디 있는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던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의 늙어감조차도 사랑할 연인 이전에, 나부터 나의 늙어감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내가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상대방의 마음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진리 아니겠는가. 자신을 먼저 사랑했을 당당한 아가사 크리스티처럼.



약이 잘 듣는 내 몸은 세월에도 민감하고 바이러스에도 세균에도 민감한 것 같아 이 코로나 정국에 더더욱 몸을 움츠리게 된다.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바위 아래 움츠려있는 조그만 물고기들처럼 오늘도 우리는 몸을 잘 감추고 숨어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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