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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31. 2020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

사유의 정원에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고, 그러고 나면 이윽고 슬퍼진다. 나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를 구별하고, 구별되는 나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애쓰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것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 오히려 순박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쯤 자유로워진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예전에 비해서는...... 민초로 이름 없이 돌을 던지다 죽어가긴 싫어, 였는데 이제는 혹여 그런 역할이 주어진 것이라면 장렬하게 더 폼나게 돌을 던지다 전사해야겠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그러면 좀 어때, 라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을 자유함이라고 불러야 할지, 포기라고 불러야 할지. 실은 존재 증명을 포기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끝내 증명하지 않으면 또 어때. 매일 소확행을 찾아내기에도 바쁘다. 게다가 이런 것이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펼쳐 든 책에 이 문장이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도 성공적으로 보이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 밑바닥까지 가지 못한다. 자식도 없고,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살며, 글을 잘 쓰지 못하고, 먹는 데다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하고 늙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왜'와 '무엇을 위하여'를 너무 많이 생각한다. (...) 불행은 도처에 있다. 바로 문 밖에. 아니면 어리석음이. 그것은 더 나쁜 것이지. 그래도 나는 쐐기풀 같은 나의 고통을 뽑지 않을 것이다.”
(1919년,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울프의 이 글을 읽으며 왈칵, 무언가 슬픈 것이 목구멍에서 차오름을 느꼈다. 그녀는 지상 위를 가벼이 걸어 다니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주머니 속에 쐐기풀 같은 그녀의 고통들을 가득 집어넣고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이런 일기를, 이런 고통의 말들을 토해놓고서. 그녀가 느꼈을 그 비참함이, 정신적 고귀함이 짓밟히는 것 같은 육체의 사소한 욕망과 시간을 견뎌내는 초조함이 이 몇 줄의 문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919년이면 그녀의 나이 37세. 정신병 증세가 조금씩 악화되던 시점이었던가.



우리는 다들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사실 인간은 다시 세분화가 가능하다. 갑각류 인간, 연체동물형 인간, 맹금류 인간......  누군가는 딱딱한 외피를 피부 맨 바깥쪽에 두고 살지만, 또 누군가는 가장 부드러운 살을 맨 바깥쪽에 두른 채 살아간다. 필연적으로 이들은 생채기가 날 수밖에 없다. 물어뜯길 수밖에 없다. 생채기가 난 연약한 피부가 아물면서 외피는 흉해지지만 더 단단해져 갑각류 인간으로 탈피하기도 한다. 사회는 그것을 때로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도 명명하고 성장 혹은 변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성장 혹은 변이로 이동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낙오된다.


우리는 모두 '나 자신에게도 성공적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에' 더 아프고, 아프더라도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아직 살아있었던 버지니아 울프처럼 '왜'와 '무엇을 위하여'를 너무 많이 생각하면서.



아아, 모든 벗들과 내가 2020년에 머물지 않고 2021년과 성공적 도킹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먹는 데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있다고 한탄하지 말고, 한심해하지도 말고, 한 살 더 먹는다고 우울해하지도 말고. 수학자도 과학자도 아닌 내가 존재를 증명할 당위는 없지 않겠는가. 그저 존재를 아끼며 보듬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의무라 여기며, 그렇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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