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뭐든지 물건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소싯적 엄청나게 좋아하던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속에서나 혹은 스필버그의 영화 <A.I>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라 여겼다. SF 소설이나 영화의 경계선 안에 갇혀 그 이상 현실세계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캐릭터 정도로 치부했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들이 개인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하여 인류의 8할은 일자리를 빼앗기고 빈둥빈둥 의미 없는 생을 이어가는 일련의 전개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기계의 공격을 받고 지배당하여 멸망한다는 스토리. 지겹게 반복되는 그 디스토피아적 예견이 슬슬 식상하던 찰나였다. 이 생소했던 과학용어 혹은 사이언스 픽션의 단골 용어가 글쎄, 어느새 일상의 명사가 되었다. 인공지능 청소기, 인공지능 스피커, 최근에는 인공지능 샤워기도 있더라.
하지만 꽤 오래전부터 기기들이 이미 인류의 삶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만 주변을 둘러봐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노트북이나 키보드 없이 몇 문장 써 내려가지 못하는 현실은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므로. 이걸 좋게 말하면 삶의 일부분, 나쁘게 말하면 '종속' 쯤 되려나.
대학 3학년쯤 되었을 무렵, 한글 워드 프로그램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써서 리포트를 제출하던 시절은 지나가고 교수들이 워드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리포트에 플러스 점수를 준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한메 타자 연습'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워드를 연습하여 처음 컴퓨터로 작성한 리포트를 제출했을 때, 나름 가슴속에서 뿌듯함이 일었다. 소위 '정보화시대'(그땐 그렇게 불렀다)에 나도 한쪽 발을 걸쳤어! 정도의 뿌듯함이었던가 보다.
졸업 후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명함을 손에 쥔 나는 제일 먼저 노트북을 마련했다. 당시 가장 핫한 노트북은 IBM의 thinkpad였다. 키보드의 정 가운데에 동그란 빨간색 마우스가 고추장처럼 콕 찍혀있던 그 투박한 블랙 노트북을 참으로 갖고 싶었으나 예산 상의 이유로 삼성의 '센스'를 구매했다. 엄청나게 다운이 잘 되어 밤새운 원고를 다 날려 보내기를 밥먹 듯하던 애증의 이름, 센스 없는 센스. 이후 또 몇 개의 노트북이 내 손때를 타고 떠나갔고, 나는 그들과 더불어 긴 시간 동안 '밥벌이'를 했다. 그리하여 서서히 키보드를 통해 손가락과 뇌의 접점을 만들지 않으면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경지 혹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인공지능 혹은 디스토피아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계에 종속된 현실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개인적 체험이 내게는 바로 '노트북'이었다.
물론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고, 진공 청소기가 청소를 해주며, 전기밥솥이 밥을 해주는 것도 비슷한 문명의 이기일 테지만 그러한 행위들이야 혹여 그것들이 파업을 선언한다 해도 그냥 빨래를 손으로 하면 되고, 빗자루와 걸레로 쓸어내면 되며, 가스불에 밥을 해도 가능은 할 것 같다. 허나 노트북이 없으면 지금의 나는 결코 '호흡이 긴 글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 진실한 고백이다.
키보드에 가볍게 손가락을 대고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써 내려가는 순간이면 나는 글을 자아내는 조그만 벌레가 된다. 꿈틀대는 그 벌레는 어느 날 문득 제 몸에서 솟아 나오는 날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키보드에 생각을 입력할 때면 조그만 물방울들이 마른땅 위로 타닥타닥 떨어지는 순간을 떠올린다. 빗방울들이 지면을 향해 내달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글자들이 만들어지고 그 문자들이 의미가 되어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그것은 이미 얇은 종이에 먹물이 붓을 통해 유영하는 소리를 지나, 연필이 종이 위에서 서걱거리는 소리를 넘어 가장 매력적인 문명적 글쓰기의 전형적인 효과음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노트북 키보드와 인간의 손가락이 접촉하는 그 지점에서 생명력을 가진 무언가가 끊임없이 피어나는 광경을 상상한다. 새가 둥지를 만들고 벌이 벌집을 만들 듯, 인간은 기기를 만들고 그 기기들에게 자신이 가진 생명을 향기를 조금씩 나눠주는 것은 아닐까. '지능'보다는 '생명'을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