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처럼 Nov 27. 2019

5. 향수, 기억의 요정

냄새에 대하여 말하자면 나는 주로 '악취'에 민감 하달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향'을 말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냄새'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서너 가지 정도의 답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굳이 선택하자면 좋은 향보다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 쪽을 더 선호한다.  



기억의 검색창에 '향수'라 입력해본다. 몇 가지의 검색 결과가 드문드문한 간격으로 느리게 띄워진다. 선물 받은 것들과 선물한 것들. 스스로를 위해 향수를 구입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초의 향수라는 것은 대학 2학년 때 한 남자아이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그는 나와 나이는 같지만 재수를 해서 한 학년 아래였던 다른 과 친구였다. 딱히 사귀었다고 말하기에도 어색할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친하게 지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특별한 날도 아닌데 뭔가를 내밀었다. 아주 조그만 향수병이었다. 보통보다 꽤나 작은 편인 내 손에 쥐어도 완전히 감추어질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내가 약간 머뭇거리고 있노라니 그 아이는 '엄마 화장대 서랍에 여러 개가 있어서 하나 훔쳐왔다'라고 했다. '훔쳐온' 그것을 나는 그냥 받기로 했다. 뚜껑을 열고 맡아본 향은 상당히 괜찮은 것이었다.



기억에의 악수, 향수



시간이 지나고 그 아이와는 어찌어찌 완전히 헤어지고 말았고, 향수는 자연스레 서랍 속 귀퉁이 어딘가에 깊이 처박혔다. 그 후 몇 해가 지나 물건을 정리하다 서랍 속에서 발견한 그것을 다시 집어 들게 되었다. 조그만 뚜껑을 열자 병 속에서 향기와 함께 튀어나온 것은 램프의 요정이 아니라 그 시절의 '기억'이었다. 대학교 2학년 시절의 내 모습이 고스란히, 여과 없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이다. 촌스럽고, 어리버리하고, 대부분의 일에 어찌할 바 몰랐던 그 시절의 나를 둘러싼 공기들이, 사람들이, 소리들이 막무가내로 그 조그만 향수병 속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그 시간의 흔적들이 거기 다 들어있었다. 나는 향이 이끌어주는 기억의 연쇄작용에 대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코가 느꼈던 기억은 코가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전거 운전처럼 깊이 그 기관에 아로새겨져 있다는 원리였다. 지금은 그 향기를 전혀 기억해낼 수가 없어도 혹여 우연히 그 향을 맡게 된다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이거였지 하며. 아마도 90년대의 그 기억 또한 동시에 생생하게 피어오를 것이고 말이지.



몇 년 전 어느 날, 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포장지를 벗겨내고 뚜껑을 열어보니 상자 안에는 조그맣고 앙증맞은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은근한 살구빛을 띤 액체가 담긴 투명한, 그리고 상당히 멋을 부린 유리병이었다. 표면에는 유명하여 익숙해진 브랜드의 네임이 새겨져 있었다. 향수? 나는 선물 받은 이의 감동적인 표정을 유지하면서 내심 비싸기만 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을 왜...? 하며 말줄임표와 물음표를 콩콩 찍어대고 있었다.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았다. 달콤한 꽃향기, 마드모아젤이라면 이런 향은 풍겨줘야 한다는 뜻일까. 예전에 텔레비전에 나오던 만화에서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꼬마 자동차도 있었는데, 이걸 매일 몸에 뿌리면 나도 힘이 생기려나. 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순수함을 나도 지닐 수 있을까. 그건 순수함일까 사치스러움일까. 이 오염된 세상에서 순수함은 사치스러움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꽃향기가 나는 향수를 나는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뿌리고 있다. 그 ‘문득의 순간’은 주로 아, 나한테도 향수가 있었지, 같은 생각과 함께 찾아온다. 또 어느 훗날 이 향을 만날 때 또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뛰어나와 반갑게 악수를 청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한자로는 다르긴 하지만 ‘향수’라는 단어는 두 개의 뜻을 품고 있다. 우연히도 그 둘 모두 ‘기억’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어쩌면 ‘기억’을 위해 향수라는 물건이 세상에 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향은 덤이고 말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4. 노트북이 있는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