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처럼 Nov 28. 2019

6. 그녀들의 화장품


"내 인생 책임질 수 있겠어?"



결혼 전 남편은 약 2년 여를 일본에서 생활하며 한 달에 한 번씩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생활을 했었다. 더 이상 서로 떨어져서 사는 생활을 청산하자며 결혼을 결정한 후 그는 나에게 같이 일본으로 가자고 말했다. 나는 기꺼이 그리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내가 하던 일이라는 것도 있고, 일본에 가서 딱히 할 만한 일도 없을 것 같아 막상 결혼을 코 앞에 두고 망설였다. 그때만 해도 다 자란 성인이 직업 없이, 즉 일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때 내가 그에게 툭 던진 말은 의아하게도,


"그럼 난 화장품은 어떻게 사지?"


였다.


특별히 메이크업을 프로페셔널하게 해야 하는 직업도 아니고 화장하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던 건지 지금 생각하면 참 묘한 일이다. 인간 생존의 필수 요건이 오직 화장품 일리도 없고 말이다. 다만 짐작컨대 당시의 내게 '화장품'이 의미하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의 경제력과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가 한다. 또 좋은 화장품을 바르지 않으면 피부가 노화될 것이고 그로 인한 노화 혹은 더 리얼하게 말해 '늙음'은 인생 최악의 사태라는 불안감이 찰나에 뇌리를 스쳐갔는지도 모른다.


"평생 화장품은 내가 사줄게요."


그는 나의 우문에 그렇게 답했고,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 14년 차가 된 요즘도 화장품을 바르는 순간 종종 그 에피소드를 떠올리곤 한다. 내 쪽에서는 정말 심각하게 질문했고 명확하고 심플한 답변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나는 "화장품은 어떻게 사지?"라는 질문을 앞세워 "내 인생 책임질 수 있겠어?"라는 대전제를 그에게 던진 것일지도 모른다. 30대 초반의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30대 초반의 한 남성에게 책임 전가시켜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화장품' 속에 슬쩍 포장하여 내밀어 스스로의 눈과 귀를 가려버렸던 것일까?



from flickr


또 하나의 화장품 일화. 대학교 동기이던 친구 녀석이 교제하던 아가씨와의 연애 상담을 가끔 나에게 하곤 했었다. 그는 말했다. 아가씨가 참 괜찮은 사람인데 딱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좋은데, 글쎄 그녀가 스킨 하나에 30만 원씩 하는 고가의 화장품을 쓴다는 것이다. 친구는 환경 친화론자에다가 배고픈 나라의 아이들을 두 세 명 정도 지속적으로 후원하던 그런 아이였던지라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것도 같았다. 30만 원짜리 스킨이라니 다이아몬드 가루라도 뿌려져 있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같은 여자 인류 입장에서 그녀도 이해가 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싱글 여성의 '화장품'이라는 것은 씻고 나서 대충 건조함을 해소하기 위해 쓰윽 바르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녀들이 화장품을 자신의 얼굴에 바를 때, '나는 이 정도의 화장품을 바를 만큼 괜찮은 여자'임을 스스로의 의식과 무의식에 어느 정도 어필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때문에 난 사랑받을 만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정신분석 학계에서 피부를 가꾸는 심리는 '스킨십' 갈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즉 피부에 고가의 관리 비용을 투자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내면에는 스킨십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친구가 내게 그렇게 상담했을 때 학계의 이 분석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괜찮은 상담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뭐 결국 그 친구는 그녀와 결혼해서 호주로 이민을 갔다. (가끔 그 녀석이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한데 연락이 끊겨 버렸다^^)



친구의 에피소드와 나의 화장품 에피소드가 '결혼'이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여자의 '화장품'은 자신의 품위랄까 자존심이랄까를 지탱해주는 상징적인 것이고, 남자에게 있어 '그녀의 화장품'은 어쩌면 자신이 지켜 주어야 할 그녀의 품위 같은 것이려나. 페미니스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이런 에피소드도 어쩌면 흘러간 세대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옛날 옛적에 어느 마을에~ 로 시작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요즘 어느 결혼 적령기 남자가 여자의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덤벼들겠는가. 결혼하여 십 년을 살아보니 적어도 한쪽이 한쪽을 책임지는 상황이 아닌 양쪽 모두가 상대방을 책임지는 보호자가 되는 것이더라.



from pinterest



어쩌면 "화장품은 어떻게 사지?"는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에 줄줄이 이어지는, 다시 사회적 명함을 갖고 내 명의로 된 카드를 그어 화장품을 살 수 있겠어? 그럴 자신은 있고? 결혼이라는 껍질 속으로 숨어들기 전에 대답해. 82년생 지영 씨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풀었어야 했는지도. 나 역시도.




cover image 출처: nudie glow

매거진의 이전글 5. 향수, 기억의 요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