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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Feb 04. 2021

A latte is a horse

부제: 대학이 내게 가르쳐 준 것

1.
대학시절 선배들과 동기들, 후배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술잔을 부딪히며 한 녀석이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건강은 건강할 때 해치는 거야, 건배!”



2.
대개, 젊음을 상징하는 음료들은 몸에 나쁘다.


코카콜라는 지속적으로 ‘젊음의 음료’라는 코드로 어필해왔고, 대부분의 탄산음료들 또한 그러하다. 예를 들어 90년대 초반 ‘ㄷㅁ소다’라는 탄산음료가 처음 나왔는데, 이 음료를 정의하는 광고 카피는 “X세대 음료”였다. 당시의 20대 초반을 그 광고에서 처음 X세대라 표현한 것 같은데, 이것은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란 사람이 소설 <X세대>에서 처음 사용한 말로, 이전의 세대들과는 분명히 다른 특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마땅히 한마디로 정의할 용어가 없다는 뜻으로 X를 붙여 새로운 세대를 지칭하게 된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대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가 통하는 면이 있어 갖다 붙인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그즈음 광고 서클에 몸담았던 '이른바 X세대' 꿈나무였던 우리들은 공모전을 준비하며 ㄷㅁ소다를 마셔댔다. 마셔야만 하는 세대니까, 의 기분으로. 하지만 이제 누구도 X세대를 주목하지 않고, 기업들은 MZ세대를 잡아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탄산음료는 그렇게 젊음을 벗어난 이들이 마시지 않는, 마시면 큰일 나는, 마시고 싶지 않은 음료가 되었다. 젊음을 벗어난 이들은 몸에 좋은 것들을 마시는 법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과시로 커피와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것처럼 아직 젊은이임을 증명하기 위해 콜라를 주문한다는 것도 서글픈 일인지도 모른다.



보드리야르는 말했다. 현대사회는 소비사회이며, 사람들은 물건의 기능을 따지지 않고 상품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위세와 권위, 즉 '기호'를 소비한다고. 그리하여 이미지와 상징이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사회라고. 굳이 시뮬라시옹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스타벅스에서 맥북을 열고 커피를 마시는 세대가 늙어 희끗희끗해지면, 더 이상 스타벅스에 젊은이들은 출입을 하지 않게 되는 이치. 우리들은 커피를 마시려고 그곳에 가는 것은 아니니까.



3.
대학 때 몸담았던 광고 동아리는 초반에는 동아리방이 부족해서 다른 동아리와 한 공간을 나눠 썼다. 왼편에는 사회과학 동아리가 있었고, 오른편이 우리의 야심 찬 광고 동아리였다. 나는 늘 동아리방으로 들어가며 내 호기심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것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며 내가 향해야 할 방향은 왼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끝끝내 오른편을 택했고 이어 냉전시대의 종식과 함께 대부분의 학생운동단체들은 해체되어 결국 우리 동아리는 방 전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결국 승리했구나......



4.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 어리바리한 자아를 포장할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우연히 접하게 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프레임을 목에 걸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 '쿨함'의 자세를 흉내 내려 나를 '몰아'갔다. 결과적으로는 쿨함을 좇을 수는 없었다, 사실상 차가운 인간이 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생각 이상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를 좋아해서...... 그 또한 좋지 않았다. 그들과 내가 다 마음이 통하는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냥 각자의 사고의 틀 안으로 각자의 하루키가 몰아넣어져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인생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어떠한 포장도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가끔은 하루키가 필요하다.




5.
대학 3학년 때 처음 굽이 있는(3센티미터 정도)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는데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체험을 했다. 처음 콘택트렌즈를 착용했고, 기초 메이크업과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고딩시절까지 스스로 외적으로 예뻐 보이고 멋져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 크고 늘씬해 보이려는 욕망은, 원래 얼굴보다 좀 더 치장된 얼굴로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은 대학 때 생긴 것이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라이프 곡선도 ‘본질’에 우선하는 것이 ‘이미지’라는 것을 체험했고 담고 있는 사회 자체도 궤를 같이 하여 그러한 흐름으로 돌아서고 있었던 거다.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온몸으로 자본주의라는 물결에 허겁지겁 물들어갔다.



6.
결론인즉 나는 대학에서 자본주의의 ABC를 배웠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대학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 곳이 아니며 ‘스스로 배우는 곳’이라고 그의 책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에서 이야기했다. 돌이켜보면 그 말이 맞다. 다만 내 경우 ‘스스로 배움’을 책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았다는 점 정도가 다를 뿐. 그리하여 뱅글뱅글 겉돌다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고 대학시절을 마쳤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



X세대라 불리던 나는 대학에서 자본주의의 ABC를 배웠지만 MZ세대라 불리는 세대의 후기 세대는 (Corona 세대?) 조기교육의 열풍에 힘입어 이제 다들 그쯤은 초등학교에서 마스터하고 있는 듯하여 가슴이 아려온다. 큰 학문을 배워야 할 대학의 현재 의미는 취업의 최전선, 취업학원 등이라 할 수 있을 테니 그것 또한 가슴이 미어진다.



7.
‘라떼는 말이야’를 번역기로 돌리면 ‘A latte is a horse.’라고 뜬다고 하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번역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정말 라떼의 말들은 눈뜨고 나면 어느새 말의 울부짖음 정도로 치부되어갈지 모른다. 낡아지는 것들이 자본주의에 의미 없는 것처럼, 새로운 것들이 급격하게 모든 낡은 것들을 대체하는 자본주의의 바다에서 아가미가 없는 낡은 말은 숨을 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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