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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Feb 18. 2021

의미 있음과 없음의 부등식

소소하게

인생은 짧고 주어진 시간은 적으니 의미 없는 일을 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 말한다. 그에 대해 대략 동의하면서도 요즘 같아선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고 무엇이 의미 없는 일인지 경계가 모호해지곤 한다. 좀 더 정확히는 의미가 없는 일이 없다, 고 생각하는 쪽이 되어 버렸다. 신기한 일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보다는 훨씬 긍정적 아닌가.



어쩌면 거의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으니 시간을 내가 전적으로 주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모든 것들이 의미 없지 않다, 분명히. 열세 살의 아이와 딱 붙어서 집에서 펜데믹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 또한 소중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으로 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날은 좋은 카드를 뽑은 듯 기쁘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다.



이전에는 그랬다. 의미와 무의미가 분명하게 구분 지어졌다. 예를 들어 빨래를 세탁기에 넣었다가 세탁이 끝나면 그걸 끄집어내어 햇빛에 널어두었다가 또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걷어 종류별로 차곡차곡 개어 옷장에 집어넣는 일, 이처럼 의미 없는 일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설거지도 마찬가지, 빨래도 설거지도 청소도 언제나 모든 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일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옷감과 세제와 그릇들이 조금씩 마모된다. 그 행위를 하는 나의 내면도 함께 서서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마모된다고 느꼈다. 그런 반복이 반복되던 어느 날 보송하게 마른빨래가 정겹게 여겨지는 순간이 왔고 이거 위험하다, 싶어 졌다. 나의 (그다지 많지도 않은) 사회성의 한 귀퉁이가 닳아 없어진 것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햇빛 속에 빨래를 널고 말라 보송보송해진 것들을 거둬들이고 착착 각 맞게 개는 행위가 어째서인지 나쁘지 않았다. 아직 남아있던 사회성도 빨래의 수분만큼 내 안에서 증발되어 가고 있다는 것도 감지되고 있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음식들의 수가 조금씩 늘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로 여겨진다. 무언가 위 속에 음식물을 채워 넣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들인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었다. 실로 거기에 쏟아야 하는 에너지와 시간은 여전히 무겁다. 그러나 적어도 '의미 없음'의 꼬리표는 사라졌다.



싫은 음악을 끝까지 듣고 형편없는 책을 끝까지 읽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 었는데 어느새 이거 좀 별로네, 싶은 음악을 나도 모르게 끝까지 듣고 있다. 시끄럽지만 않으면 된다 정도로 스스로와 합의를 본 것 같다. 뭔가 BGM이 깔려있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다. 그래도 형편없는 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단칼이다. 좀 더 기준이 확실한 편인 것이다. 종이의 낭비, 편집의 낭비, 어쭙잖은 사상의 낭비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런 것들은 책이라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품’이다. 이런 분리된 사고는 아마도 애정과 관심 분야의 문제인 듯싶고.



무엇을 하건 거기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손가락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어진다. 마음이 손가락과 체력에 영향력을 발사한다. 의미를 찾으면 저 깊은 폐부 안쪽에서부터 힘이 솟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의미부여. 나로서는 절실하다. 그러니 의미 있음과 없음의 부등호가 있음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은 삶이 견딜만하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움직임은 여전하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 펜데믹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멈춤. 멈춤일까?




그림출처: Bored p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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