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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May 25. 2021

<달 너머로 달리는 말> 희뿌연 것들의 자취

읽기의 자율주행

때때로 아주 예전에 꿨던 꿈을 다시 꿀 때가 있고 그 꿈을 현실에서 자각하며 기억해낼 때가 있다. 시작도 끝도 없고 목적도 불분명하지만 그 꿈 자체가 내포하는 세계는 명확하다. 다만 내가 그것을 간파하지 못할 따름이다. 그런 꿈들은 이상하게도 주변이 어둡다.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서 그 꿈을 헤매고 다니며 체력마저 소모되는 느낌이 든다. 김훈의 이 소설을 읽으며 그 꿈들 생각이 났다.



작가가 창조해낸 그 허구의 세계는 검은 꿈을 더듬어가는 것처럼 어둡고 질척했고 명료하지가 않았다. 끈기를 갖고 읽어나가며 줄곧 생각했다. 사람이 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듯 이 작가는 이미 대중이 알아들을 만한 글을 쓰고 있지를 않구나...... 아니 알아듣는 것 같다가도 다시 무얼 말하고 있는지 결국은 알 수 없는 그러한 문장들의 연속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자 책의 뒷 표지 안쪽에 이런 작가의 말이 적혀 있다.





아마도 양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는 대중성을 넘어선 소설을 쓰고 있다. 딱, 남한산성. 거기까지가 아니었을까. 그 후로 작가는 더 이상 독자같은 것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떤 독자는 그의 소설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 이런 귀절을 적었다. 3호선 전철의 창 밖 풍경의 변화에 얼굴이 하얘질 정도로 놀란다는 말과 함께,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


길고 지루한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처럼 대체 이야기의 줄기라는 것이 간파되지를 않았다. 줄기가 없는 이야기가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꾸욱 참고 뒤를 향해 책의 고삐를 잡고 달리기 시작하자 이야기의 심줄이 느껴졌다. 심줄은 무척 질겼으나 강줄기처럼 잡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소설들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너무도 길어서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이 (누가 누구인지 몰라) 쉽지 않다는 누군가의 평을 봤었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의 이름들은 반대로 너무나 짧아서 기억하기 어려웠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거의 끝마칠 무렵에야 초와 단, 표, 칭, 월, 연, 목 등의 이름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야백'과 '토하'는 이 소설의 실질적인 남주인공, 여주인공인데 그들은 사람이 아닌 말(馬)들이다.


​​


추상화를 바라보며 창작자의 의도를 파악해낼 필요가 없고, 시를 읽고 그 시의 함축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대학 입시 문제로 족하다. 입시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그 시의 함축된 의미가 무엇이고 무엇을 무엇으로 은유했는지 굳이 외울 필요는 없다. 그저, 느끼면 된다. 이 소설은 작가의 추상이고 그 추상을 시조마냥 길게 펼쳐놓은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조, 길고 긴 시조다.


이것은 그러니까, 남이 읽으라고 쓴 소설이 아니다. 작가 자신의 답답함을 목적없는 전투 위에 얹어두었다가 혼백에 얹었다가 말 등에 올라타고 달리다가 다시 저물어버리도록 그냥 놓아두고 그저 새어나오도록 놓아두니 쏟아져나온 글들이다. 세상 변화의 속도에 기진하여 새어나온 작가의 한숨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사실은 읽지 않아도 된다. 읽지 않아도 될 것을 읽었다. 읽으면 안될 것은 또한 아니지만. 그래도 그 명문들이 나를 통과해갔다는 것에 한줄기 위안을 느끼는 중이다. 비록 '추상 시조'적이기는 할지라도.


​​


사람의 마음속에는 뚜렷한 것도 있고 희뿌연 것도 있는데, 희뿌연 것들을 문자로 잘 가꾸면 뚜렷해질 수 있다고 글 하는 자들은 말했다. 단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것들, 간절히 옥죄는 것들, 흐리게 떠오르는 것들을 글자로 적어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는데 글자가 글자를 낳아서 글자는 점점 많아졌다. 단은 그 글자들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으로 믿었다. 글자의 뜻을 이룩하려는 오랜 세월 동안 글자들끼리 부딪치면서 많은 피가 흘렀고 피 안에서 또 글자들이 생겨났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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