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초의 픽션, SF 소설)
-엄청난 전염병이었죠. 지독했습니다. 그토록 거센 난관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경외심마저 품고 있습니다.
나는 탁자에 아무렇게나 놓인 이주제안서를 간신히 내 눈앞으로 당겨왔다. 행성과 행성 사이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노락은 달분화구 같은 피부를 지녔다. 우주선을 너무 자주 타서 방사선이 피부를 망쳐놓기 전엔 아주 매끈한 미남이었다는데, 단지 그의 인사치례와 같은 유머에 일일이 다 웃어줄 여유는 나에게 없다.
노락의 노련한 적응력과 표현력은 가끔 그가 지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나는 그의 웅변에 마음을 지키려는 방패라도 되듯이 이주제안서 뒷장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냐! 그게 아니지... 나는 불현듯 되새긴다. 이번 이주제안은 가족들의 생사에 중대하다.
노락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나와 우리 가족은 영웅이 아니다. 영화속에서 온갖 재앙을 뚫고 살아남은 드라마틱한 일대기의 주인공들의 아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간신히 버텨내고 있다.
이번 이주제안은 그래서 필사적이다. 그들은 아무런 운송비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뭔가를 요구한다면 그게 뭐든 우리에겐 아주 절망적이다.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지구인의 80%가 8년만에 사망했죠.. 그리고도 전염병은 2차 3차로 지구를 쓸었습니다. 그런 일은, 그러니까 그런 극단적인 사태는, 지구인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은하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흔한 일은 아니죠. 그게 아마 2030년?
-2033년이죠. 제가 살던 나라는. 다만 그 첫 발견한 해를 따서 2030격변이라 부르죠. 지구에선. 당신네 나라에선 뭐라고 부르나요?
-제 나라요? 제 나라에선 남의 별에 관심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습니다. 은하엔 수많은 행성이 있죠. 그보다 더 많은 생명체와 영혼이 있구요. 하지만 낙심하실건 없습니다. 전 관심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당신들에게요. 전 당신들이 필요한 걸 압니다. 다른 별이죠. 지구에선 갈수록 살기가 힘들죠?
은하 행정가들은 지구 파멸의 책임은 지구인에게 있으므로 지구인이 전멸당하지 않는한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죠. 한마디로 방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에 다른 면도 있습니다. 당신네 몇 몇이 다른 별로 이주한다고 해도 별 관심없을테지요.
-그 얘길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맞아요. 맞아요. 그래서 여길 보시면 푸마라는 행성이 있습니다. 지구에선 다른 별에 가려 안보이죠. 푸마는 지구보다 3배 더 큽니다. 그런데 환경은 비슷하죠. 금방 적응할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 엄청난 전염병과 기아에서도 생존한 분들이니까요? 맞죠?
-네 맞습니다만, 전염병 얘긴 그만 하면 좋겠네요? 언제부터 갈 수 있나요?
-언제요? 지구 시간 기준인가요? 그게 좀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군요. 지금은 푸마엔 갈 수 없어요. 거긴 제1의 종족이 있죠. 하지만 몇 주기 안에 멸망할 겁니다.
-푸마행성이요?
-아니요? 푸마행성에 거주하는 종족이요. 말하자면 지구에서 수십만 년 전 공룡이 사라진 것처럼. 그렇게 빈 곳이 됩니다. 그때 이주하시면 됩니다.
-저희는 당장 이주할 곳이 필요합니다.
-그럼 떠나세요.
-어디로요?
-어디든지요. 이 우주는 넓답니다. 광활하죠.
-실은 그 광활함이 문제가 된답니다. 지구의 과학기술로 몇 차례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죠.
-걱정마세요. 우리가 운송편을 제공하죠. 단지 푸마행성에 제1종족 자리를 그냥 드릴 순 없어요. 우선 세이가 행성에서 7~8세대 정도 머무세요... 그 뒤에 다시 운송편으로 푸마행성으로 이주시켜드리죠.
-조건이 뭡니까?
-조건이요? 신체조건? 아 댓가를 말씀하시는 군요. 지구의 상거래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런 건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남은 지구인의 생명력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구인이 이렇게 하루하루 절망과 비탄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원망하며 죽어가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솔직이 현 상태에서 지구인과 상거래 할 종족이 이 우주에 어디있겠어요? 지구인이 가진 건 몸뚱이 뿐인데... 오직 우리는 지구인의 정신과 몸뚱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푸마 행성의 제1종족이 되어주세요. 그 이후에 번성하게 되면 은혜는 나중에 갚아도 되니까요? 문제는 세이가 행성에 있습니다.
세이가는 아마 인간이 번성하기 직전 지구와 같은 생태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생물종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구인이 가게되면 제1 종족이 될수 없습니다. 제2종족으로 살아가야 하죠.
-제2종족이란게 뭡니까?
-그러니까 음... 그렇죠... 돌고래가 지구의 제2종족이었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몰랐습니다. 지금 돌고래는 다 어디로 갔죠?
-그걸 모르시는 구나. 다른 행성으로 갔죠. 원래 돌고래는 만년 후에 지구인을 대신해서 제1종족이 될 운명이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지구가 이모양이니까요. 그렇지만 돌고래 책임은 아니였죠. 돌고래들이 그렇게 메세지를 보내며 지구인을 걱정했었다고 하더군요... 돌고래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은하 행정단에서 아마 다른 행성의 제1종족으로 이주시켰을겁니다.
-저희가 떠나면 지구는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되다뇨? 여전히 지구죠. 그렇지만 지금 상태라면 남은 인류는 변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변태가 뭐죠?
-지구인은 진화라고 부르는 거죠.. 환경이 바뀌었으니 변태가 되겠죠... 하늘 높은 건축물, 비행기, 엄청난 다리와 컴퓨터 등은 모두 잊게 될 겁니다. 뇌가 퇴화한다고 봐야죠.. 안그럼 살아날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오랑우탄 처럼 되나요?
-모르셨나요? 유인원은 지구인과 같은 종족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종족이죠. 진화 역사상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지구인들은 유인원이 진화하지 못한 자신들의 과거라고 믿었지만, 실은 지구인의 미래가 될겁니다. 제1종족은 먼 미래에 다른 종족이 대신하겠죠.. 돌고래 종족이 다시 돌아올수도 있구요.
-제 2의 종족이 된다면, 제1의 종족에게 어떤 취급을 받게 되나요?
-다 아시면서, 당신들은 돌고래를 어떻게 대했나요? 크리스마스에 초대해서 식사라도 대접했나요?
-불가능하죠. 돌고래는 수생동물인데.
-제1의 종족과 거리를 두는게 안전합니다. 언제나 어느 별에서든 그건 변함 없습니다. 아마 제2의 종족이 되면 친구처럼 환대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 환대가 늘 이어질 거라 믿어선 안되죠.. 동물원에 한 마리 호랑이처럼 늘 털을 곤두세우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길들여져서도 안됩니다. 그렇다고 적대적이 되어서도 더더욱 안됩니다. 개나 고양이의 방식은 절대 답이 아닙니다. 야생 늑대처럼 무리지어 제1의 종족을 공격해서도 안됩니다. 돌아오는건 몰살뿐이죠. 세이가 행성은 지구보다 조금 작다고 보시면 됩니다. 금방 발각될 겁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7~8세대면 살아가면 당신들을 다시 태우러 운송단을 보낼테니까.
나는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온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막말로 참치를 잡아먹듯, 우리를 유용한 양식으로 생각하면 어쩌죠? 아니면 코끼리처럼 서커스와 재롱을 강요당하거나, 소나 말처럼 동력원으로 부려먹는다면요?
-거기까진 저희가 상관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시죠? 맑은 공기와 펼쳐질 대지를 생각하세요.. 그리고 노란, 아참 거기의 강은 파랗지 않습니다. 노란색이죠. 금방 적응될겁니다.
-그럼 하늘은 무슨 색이죠?하늘도 노랗겠군요.
-그게 중요한가요? 지구인은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환경입니다.
-환경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노락의 표정이 굳어졌다.
-중요한게 뭐죠? 지금 당신네 조상이 남긴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핏물이 섞인 강물에 얼굴을 씻고, 빗물을 받아 마시는 삶을 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게 뭡니까?
-옳소!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자긍심이죠.
-그들은 지구인이 돌고래를 포경하던 것처럼 막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약속하죠.
-아까는 약속할 수 없다면서요?
-사실 세이가 행성의 제1종족이 원래 있던 제2종족을 멸종시킨 건 맞습니다. 두 종족 사이에 소요가 있었고 마침내 학살이 일어났죠. 하지만 그건 제2종족의 지나친 공격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일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번 운송비를 제공하는 것도 세이가 행성의 지식인들입니다.
-왜죠? 제2종족의 고기맛을 못 잊어서는 아니구요?
-그건 말도 안되죠? 잡아먹다니? 인간처럼 아무거나 막 먹고 그런 종족은 우주안에서도 희귀합니다.
-솔직히 말해보시죠. 세이가인들이 지구인이 필요한 이유가 뭡니까?
-착해보이고 싶어서죠. 다른 종족하고도 잘 지낼 수 있나는걸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만일 그게 실패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하지만 지구인은 강한 생명력이 있잖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구인 정도라면 어떤 소요가 있더라도 살아남을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이주제안은 없던 걸로 하지요.
-한 번 더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구인은 많습니다. 우리는 꼭 당신이 아니여도 됩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가겠죠. 안그런가요?
-그렇겠네요. 하지만 저와 제 가족은 지구에 남겠습니다.
-그 결정. 번복해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진심인건 맞나요? 제가 방금 들으니 당신네 가족은 벌써 이주할 준비를 하고 계시다던데.. 남은 물도 다 써버리구요... 내일이라도 운송선을 정박시키면 탈 마음이 있어보이더군요. 참고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형편에 뭐 가져갈 것도 없지만.
-옷은요?
-옷이요? 그건 필요없을 겁니다. 그 행성에 맞는 패션이 뭔지 지금은 모르시잔아요.
-중요한 건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잃지 않는겁니다. 그에 더해 더욱 중요한 건 안전입니다. 이 둘 다가 없으면 갈 수 없습니다.
-둘 다 보장합니다. 하지만 살짝 눈감아 줘야 할 부분은 있을겁니다. 저어길 보세요. 뭐라고 써 있습니까?
-카페요?
-아니요 그 옆이요.
-미용실이요?
-아뇨! 그 아래요.
-월세방 있음?
-그보다 큰 글씨인데...저도 글을 읽을 줄 압니다. 정육점이라고 써있군요.
-그래서요?
-저거 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을 겁니다. 약속하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가족이 마실 물이 떨어질 때쯤 다시 오겠습니다. 그게 3일 후일까요? 모레일까요?
-그런 식이라면 더 이상 협상하지 않겠어요.
-존중합니다. 최대한의 존중을 보장합니다. 이런건 당신네 말로 배려하고 하나요? 저는 배려심이 많습니다.
-세이가 행성의 종족들도 배려심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럴 겁니다. 약속은 못하지만.
나는 돌아 나와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야한다. 신발을 신었는데도 밑창이 맨바닥처럼 차갑다. 더 나은 신발을 내일 구할 수 있을까? 하늘을 올려보니 파란 곳에 군데군데 멍이라도 든 것처럼 검붉은 구름이 뭉쳐있다. 어떤게 옳은 결정인지 나는 판단할 수가 없다. 그저 침만 꼴딱 삼키고 돌아 보지 않고 걸었다.
(100초 소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