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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나 Oct 23. 2021

“아빠가 없는 불쌍한 우리 조카….”

외숙모의 한 마디로 처절하고 잔인한 현실과 조우하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하고야 말았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영원한 이별은 존재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 할 순 없다. 다만 이곳에서만 가능한 일, 가령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후쿠오카 맛집을 같이 갈 수 없고 한때 약속했던 오로라를 보러 함께 가지 못하며 이제 겨우 머핀 굽는 요령을 익혔는데 같이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아빠의 죽음을 접했을 때 나를 콕콕 찌르기 시작한 건 이런 깨달음이었다. 내 세상의 기둥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과, “아빠가 없는” 자잘한 삶의 요소가 나의 삶을 채워가게 된다는 것, 깨달음이 위치한 반경은 나를 중심으로 우리 가족, 그리고 가까운 친인척이 정도의 관계 정도의 넓이였다. 이 범위를 뛰어넘는 세계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몇 시간이 지난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가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이었던 만큼 그것에 압도당해 생각의 회로는 가시적인 범위 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게다가 병원 측에서 던지는 질문(상조회사에 연락은 하셨는지, 사망진단서는 몇 장이나 필요한지 등등)과 한국으로 들어와야 하는 동생을 위한 여러 서류 발급 등에 쫓겨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이 지니는 의미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몇 시간을 보냈다.


그저 멍한 상태로 사방에서 들리는 말에 치이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나에게 현실의 날카로움을 느끼게 해 준 건, 엄마 전화 한 통에 바로 병원으로 오신 외숙모의 한 마디였다.


우리 조카, 불쌍해서 어째. 벌써 아빠를 잃어서 어떡해.  아빠 없어서 불쌍해서 어쩜 좋아.”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현실의 무게가 나를 내리쳤다.




지금까지 나를 힘들게 했던 대부분의 것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남들과 비교하며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느꼈던 열등감, 나 같은 사람은 절대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자괴감, 나를 향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의심 등등. 오랜 기간 이것들과 싸우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 왔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이것들의 잔인함과 잔혹함을 가볍게 치부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나의 고백이 없다면 타인이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점, 나의 마음가짐, 생각의 방식을 바꾼다면(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약한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아빠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나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현실이며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잊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잠깐 알량한 가면을 뒤집어쓴다고 해서 숨겨질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며 타인이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사실”이기도 했다.


내 속에서 가릴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현실과 평생 함께 해야 한다는 것. 숙모의 한 마디는 이토록 잔인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머릿속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사고 회로는 작동을 멈췄다. 표정도 말도 생각도 제어할 수 없었다. 지극히 기계적이고 반사적인 언행이 나를 이끌 뿐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나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사실과 감정. 이것들은 여전히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심연의 어디론가 끌어내리려는 듯한 기세를 보여줄 때도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숙모의 한 마디를 접했던 당시에는 나 같은 존재가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그 모든 잔인함을 쥐고 있기엔 난 너무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차근차근 타협을 배우고 있다. 아니, “타협을 배운다”가 아닌 “적응을 했다”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게 남은 이들의 숙제이자 삶 그 자체이겠지. 하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내가 나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나라는 인간을 드러낼 때 (매번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럼에도) “아빠가 돌아가신”이라는 수식어를 내 입으로 소리 내서 말해야 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싶다고 하면 아직 너무 어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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