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라서 받아들이 힘든, 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
생전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의과대학 시신기증을 신청하셨다. 대학 병원에 진료차 가셨다가 시간이 나서 평소 생각하시던 시신기증을 신청하고 왔다고 하셨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망설였다. “시신 기증”이라는 게 일반적이기도 않을뿐더러 평소 이에 관해서 그 어떤 언급도 없으셨기에 더 그러했다. 당황과 함께 짙은 섭섭함과 야속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미리 이별을 준비하실 필요가 있을까? 허락된 시간이 아직 많은 지금, 다른 중요한 것도 많은데 왜 하필 시신기증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신 걸까? 행복하고 생산적인 것을 생각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시간도 부족한데….
내가 경험한 대학병원 시신기증 절차는 대략 이렇다. 시신기증을 신청한 가족이 사망하면 신청 시에 받은 안내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한다. 항시 대기 중인 담당 직원이 신속하게 병원(혹은 집)으로 와서 전화한 그날 바로 고인을 모셔간다. 예상과 달리 특별한 의식이나 절차 같은 것도 없다. 미리 시신기증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유족이 서류 작성 등을 대신해야겠지만 생전에 그 뜻을 밝히고 준비한 분일 경우 그 과정은 더 간략하다.
시신기증을 신청한 대학병원은 외할머니의 사망을 선고한 병원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시신기증”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막연히
“그쪽에서도 준비와 절차라는 게 있으니 몇 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늦은 시간에 전화했으니 내일쯤 오는 거 아냐? 그럼 할머니는 어디에 모셔야 하지?”
라는 말을 꺼내며 다들 우왕좌왕했다. 그렇게 잠시 서성이고 있으니 핸드폰이 울렸다. 우리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빨라도 3~4시간은 걸릴 거라 생각했던 가족들은 다급해졌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특별한 절차라도 있나?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이렇게 저분을 맞이해도 되는 걸까? 멍하니 서 있었던 우리와 달리 담당 직원은 재빨리 움직였다. 어느새 우리에게 다가와 외할머니 옆에서 힘없이 서 있는 엄마와 외삼촌에게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넨 후 그대로 할머니를 모실 채비를 했다.
“이게 다예요? 끝인 거예요?”
엄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담당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대로 모셔가는 게 전부라며 할머니가 우리에게 돌아오기까지 약 1년 반에서 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고인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가 되면 그때 저희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 한마디와 함께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담당자는 할머니를 태우고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가족은 뭐가 뭐지 모르겠다는 멍한 표정으로 동네 병원 주차장에서 대학병원 응급차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시에는 이 담담한 과정이 무성의하게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분을 그냥 이렇게 모셔 간다는 것인가. 이런 언행이 그들의 최선이란 말인가.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그때의 흐름을 떠올려 보면 그 담담함이 고마웠다. “작별”이나 “마지막의 마지막”과 같은 단어가 각인될만한 그 어떤 말이나 행동, 의식이 있었다면 그 모든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격해질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은 그 신속함과 차분함이야말로 그분들이 프로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돌아가신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중환자실을 우리에게 담당 간호사는 장례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상조 회사에 전화는 하셨는지 이런저런 질문들이 쏟아냈다. 사실을 차분히 받아들일 여유도 눈물에 빠져 있을 시간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너무도 많은 것을 결정하라고 우리를 재촉했다. 아빠가 생전에 그렇게 부탁한 “시신 기증”을 떠올릴 틈도 없었다. 내 앞에는 다른 숙제가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외국에 있는 동생의 격리 면제를 위한 서류 준비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현실은 작은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서류 리스트를 체크하도록 했다. 증명서 발급기가 말을 듣지 않아 병원 로비에서 기계를 향해 슬픔을 가장한 화를 퍼붓기도 했다. 내가 증명서 발급기를 찾아 미로 같은 병원을 빙빙 도는 동안 엄마는 남편의 마지막 유지인 “시신 기증”을 위해 움직이셨다.
사전 신청 시신기증에 관해서는 두 번(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경험이 있었지만 대학병원에서 돌아가신 그날 시신기증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시신 기증 담당부서 사무실에서 서류 작성 후 설명을 듣고 있다는 엄마 전화를 받고 그곳으로 향한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가까운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듯이 몇 개월 전부터 시신기증 신청해 달라는 아빠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아빠의 그 요구가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훗날 자식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는 배려 섞인 선택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불길한 징조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시신기증 신청”을 입에 올릴 때마다 외면하거나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은 당신이 직접 하면 될 걸 왜 나에게 부탁하시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피하고 싶어서 신청 방법을 꼼꼼히 살피고는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답니다”라는 무미건조한 한 마디만 건넸다.
한 달 전 기억은 상황의 엄습과 함께 날카로운 죄책감으로 변모해 몸과 마음을 찌르기 시작했다. 과거의 내가 미워졌다. 흔히들 말하는 “어떤 느낌”이 아빠를 움직였을지도 모르는데 둔한 나는 그 신호를 읽어내지 못했다. 그때 아빠의 무수한 말을 행동으로 담았다면 죄책감의 무게를 뺀 슬픔 정도만 감당하면 되었을 텐데. 하지만 아빠를 떠나보낸 지금도 “시신기증”은 자식 입장에서 선뜻 “그렇게 할게요”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너무 확실한 사후 절차인 데다가 일반적인 선택이 아닌 만큼 ‘부모님의 의사 존중’이라는 이유로 동참할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또한 시신기증으로 보내드렸지만 이번은 확연히 달랐다. 이견없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인 엄마, 이모들, 외삼촌들이 대단하게 생각될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나의 이기심으로 흩어진 아빠의 의중을 한 데 모아서 실천해야 할 때다. 가장 걱정했던 엄마도 아빠의 뜻대로 해드리고 싶다고 밝힌 이상 내가 “싫다”며 고개를 내저을 이유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아빠 생전에 미리 신청하지 않은 나의 어리석음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고자 최후의 순간까지 아빠를 바라보자고 마음먹었다.
“이젠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인을 한 번 더 보시겠습니까?”
시신기증 담당과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마치고 설명까지 다 듣고 나니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으며. 직원은 말을 꺼냈다. 담당 사무실도 이리 삭막하니 지금 아빠가 누워계시는 방도 그리 포근한 공간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엄마는 이것으로 족하다고 자신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으셨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명확한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난 아빠를 보겠다고 했다. 내가 걱정되셨는지 외삼촌도 따라가겠다고 하셨다.
안치소는 사무실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얀 공간 안에는 금속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아빠는 그 위에 누워 게셨다. 한두 시간 전에 중환자실에서 봤던 모습과 비교하면 훨씬 창백해진 모습이었다. 가족들 중에서 내 얼굴만 까무잡잡하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하시던 그 피부톤이 이렇게도 하얘질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뽀얀 얼굴을 하고 계셨다. 비현실적인 피부색에 평화로운 표정까지 분명 내 아빠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 순간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교차해서 그 중 하나를 건져 문장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어쩌면 이 사람이 내 아빠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강렬해서 이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시간 동안 순식간에 몰아친 잔인한 현실 속에서 이리저리 기우뚱하던 나는 하얀 아빠 얼굴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고 적당함 혹은 적정선이라는 걸 잊은 채 아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찰나였지만 그 공간에 나와 아빠만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이 나를 지배했다. 한없는 평온을 얼굴로 보여주는 아빠와 함께하면 나도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워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외삼촌이 나를 붙잡고 “이제 그만 가자”며 잡아끌었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을 잡아끌며 아빠의 영육(靈肉)과 이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