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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나 Oct 23. 2021

슬픔은 나누면 정말 반이 되는 걸까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슬픔의 크기

애초에 감정이라는 게 나눌 수 있는 것이며 나눔으로 인해 반감될 수 있는 것일까.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빠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두어 번 장례식장에 가셨다.  코로나 19로 사람이 많은 곳에 되도록이면 방문하지 말라는 등 방역 수칙을 지켜 달라는 메시지가 미디어를 장악하던 때였다. 엄중했던 사회 분위기도 있고 해서인지 장례식장에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지인을 잃은 슬픔도 한몫했겠지만 마스크를 내리고 음식을 먹으며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이 답답하고 또 안타까우셨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을 방문하실 때마다 만약 내가 죽으면 그냥 가족끼리 예배드리는 장례로 해달라고 하셨다. (그땐 이 농담 반 진담 반이 참으로 듣기 싫었다) 오붓하게 가족장을 끝낸 후 자신의 부고를 내 달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엄마와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이든 앞서 생각하고 계획하는 게 좋다고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며 짜증을 냈다가 때로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빠의 쓸데없고 불길한 그 걱정들이 너무 싫었다.


슬프게도 아빠의 몇몇 언행은 단순한 염려가 아닌 예언이 되어버렸다. 특히 2021년 2월 중순에 내 이메일로 보내 놓으신 “내가 죽으면 연락할 사람들” 명단은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남은 이들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꼼꼼함이  감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 없이 슬펐다.


생전 몇 번이고 강조하신 말씀이었기에 우리는 주저 없이 가족장을 선택했다. 장례 후 아빠가 미리 준비해 주신 명단의 분들께 부고를 보냈다. 일반적인 장례식을 할 거라 생각했던 아빠 지인분들에게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무리 고인의 뜻이라 해도 이건 아니라는 친인척과 지인 분들의 연락도 받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래도 코로나 19를 걱정하셨던 생전 아빠의 그 모습을 외면할 만큼 우리는 모질지 못했다.




장례식은 고인과 작별을 위한 의식인 동시에 고인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슬픔과 추억을 나누는 기회이기도 하다. 어찌 돌아가셨는지 이야기를 듣고 슬픔을 나누며 고인을 기억하고자 각자의 이야기보따리를 풀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을 다독이는 시간. 누군가에겐 하루로 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3일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죄송하게도 우리는 아빠의 지인 분들께 그러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해 드리지 못했다. 아빠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어온 분들에게는 지금 생각해도 그저 죄송하기만 하다. 터질 듯한 슬픔을 마음껏 풀어놓을 곳이 장례식 외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여러 모로 배려가 부족한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최선이었다.


갑작스러운 부고도 황망한데 어디로 오란 말도 없어 답답함을 느낀 분들은 우리 집으로 직접 찾아오셨다.

분명 ‘언제 가야 좋을까? 언제쯤이 적당할까’라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적절한 시기”에 대한 답은 다 제각각이어서 아빠 지인분들이 우리 집에 찾아오시는 시점도 들쑥날쑥했다. 어떤 분은 삼일장 기간 내에 찾아오셨고 또 어떤 분들은 몇 달을 기다렸다가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다. (내 기준에는)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찾아와 주시는 발걸음에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방문과 배려가 감사한 만큼 야속하기도 했다.


태어나서 단 하루도 아빠 없는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나와, 결혼 이후 늘 옆에 있어 줄 거라는(비록 죽음이 언젠가 갈라놓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확신만 가지고 살아왔던 엄마에게 아빠가 없는 하루하루는 견디고 또 견뎌야 하는 나날이었다.  집 안팎에는 아직도 아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젠 “부재”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요동치는 감정을 삼키고 또 고르게 다지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모두가 쉽게 말하듯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매 순간이 울지 않겠다는, 의연해지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수많은 다짐이 하루를 구성했고 그렇게 일주일, 한 달이라는 시간을 쌓아 나갔다.


하지만 아빠의 지인이 대문을 두드릴 때마다 그간의 노력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앞서 말한 노력의 면면이 언뜻 보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빠(남편)의 영원한 부재”를 이성적으로, 명백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사실과 거리를 두기 위한 벽돌 쌓기였다. 지금까지와 변함없는 단단한 일상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면 “아빠가 없다”라는 현실과 척을 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그 처절함이 뻔한 하루하루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의 근간이었다.


애석하게도 까치발로 높이 쌓아 올린 일상이란 벽은 지인들의 방문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은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그때마다 꾹꾹 눌렀던 감정은 봉선화 꽃 씨앗처럼 쉽게 터졌다. 꾸역꾸역 일상을 잇고 쌓았던 노력이 물거품이 될 때마다 엄마는 돌아가는 지인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주시는  정말 고마운데   슬퍼지는지 모르겠다 ……”


나눌수록 슬픔은 커졌다. 안간힘을 다해 아문 상처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터졌다. 지인들과 마주하자마자 눈물은 흐르기 시작했고 종일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다. 그분들과 나눴던 대화는 겨우 가라앉은 감정을 맹렬히 섞어댔고 나와 엄마는 그 격렬한 움직임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때로는 흔들어댄 탄산음료 캔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감정을 수습하려 가슴을 쳤다. 그 모든 과정과 시간이 너무 아팠고 또 슬펐다.  




흔히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기쁨이야 그렇다 쳐도 누군가를 잃었다는 슬픔이 나눈다는 것만으로 크기를 줄이고 농도를 낮출 수 있는 것이었던가.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을 완벽히 잊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이지 않게 감추려 했지만 가끔은 그럴 기회마저 빼앗겼다. 철저히 고립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안다. 우리에게 확실했던 것은 지인들의 방문과 말 한마디 한 마디는 완벽한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아쉬움, 슬픔이 얽힌 감정을 증폭시켰고 눈물로 강을 이루게 했다. “태연한 일상”을 기워가던 노력에 방문은 가위질과 같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져 온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진실은 적어도 나와 엄마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래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빠의 부재도,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사실도.

때로는 마음과, 혹은 경험과 상반되는 “인식”이 일상을 지탱하는 기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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