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아우로부터
서둘러 뛰어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흰 천에 덮여계셨다. 할아버지 손에 자란 나는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임종을 못 본 사람이 되었다. 내 나이 13살, 여름의 일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땅에 주저 앉아 울었다.
화장터에 갔다. 어린 아이들은 화장을 지켜보는 방에 들어오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방에서 쫓겨난 나는 화장이 진행되고 있는 화장터로 뛰어갔다. 아무도 내가 화장터 쪽으로 뛰어간 줄 몰랐다. 그렇게 나는 유리창 하나 거치지 않은 생생한 장면을 보고 말았다. 사랑하는 내 친구, 할아버지가 잿가루가 되어 나오는 모습을 말이다. 잿가루가 된 할아버지를 관리인들이 나와 작은 빗자루로 쓱쓱 쓸어 담았다. 가루들 중 몇은 빗자루가 일으키는 바람에 못이겨 먼지처럼 날아갔다. 그 때 날아간 가루들은 할아버지 몸의 어디쯤이었을까. 너무 일찍 죽음을 배웠다.
그리고 15년 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죽음을 배웠던 그 시절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른이 된 나에게는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기도할 줄 아는 애도의 기술이 생겼다. 그럼에도 죽음은, 이별은 익숙해지는 법이 없지만.
외할아버지는 황해도 송림분이셨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몇번이고 하셨지만 성공한 적은 없으셨다. 다만 동향민들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찾아가 그리움을 달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눈이 좋지 않으셨다. 그래서 외할아버지 머리맡에는 언제나 작은 카세트 라디오가 놓여있었다. 카세트에서는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백마야 울지마라"가 흘러나왔다. 할아버지의 눈 앞엔 무엇하나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고서는 언제라도 선명하게 고향을 마주하셨겠지.
어른이 되어 장례 행렬 속에 껴 있으니, 이 또한 여행같다. 고인과 떠나는 마지막 여행. 서울을 벗어나 고인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함께 향하는 길이다. 차는 도시를 벗어나 건물만 듬성듬성 자란 벌판을 가로질러 파주 탄현면에 위치한 동화경모공원에 도착했다. 실향민 전용 공동 묘지다. 평생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한 줌의 재가 되고서야 이남의 가장 북쪽 자리로 모여들었다. 이곳 탄현면은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가 만나 황해로 향하는 출발점이라 한다. 함경남도에서 시작된 임진강과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한강이 만나는 곳. 남쪽의 실향민들의 마음 속으론 이미 1000번도 넘게 북쪽에 두고온 가족과 만났을 텐데. 북에서 온 강물과 남에서 온 강물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쉽고 자연스럽게 섞여들어간다. 그래서 이곳은 실향민들의 마지막 거처로 어쩌면 더할나위 없이 알맞은 곳이다.
묘지에 도착하자, 뜻 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양복을 정갈히 차려입은 백발의 노인이 혼자였다. 노인은 외할아버지의 오랜 아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엄마는 그 노인이 장례식에 제일 먼저 왔던 조문객이라고 말해주셨다.
노인은 말씀하시는 소리는 명확하였으나, 듣지를 못하셨다. 큰소리로 고함을 쳐야, 노인에게 우리의 말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모들과 외삼촌은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외할아버지의 뜨끈뜨끈한 분함위로 차가운 흙이 쌓이고 또 쌓였다. 숨막히는 적막위로 몇몇 누군가의 흐느낌이 쌓이고 또 쌓였다. 그렇게 소복이 쌓인 흙이 제법 무덤의 모양을 갖췄을 때,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어젯밤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편지가 있다고 했다. 노인은 에이포 용지에 가지런히 타이핑된 종이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주셨다. 직접 글씨로 쓴 편지를 손주를 시켜 타이핑해오신걸까 하는 궁금증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노인은 무덤에 가까이 다가가, 편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이 나왔지만, 소리내지 않았다. 어른이라면 소리내어 울면 안될 것 같았다. 잠잠히 마음 깊이 울었다. 노인은 힘차게 "형!!!"이라고 부르며 낭독을 시작했다. 그 한 마디에, 젊은 시절의 외할아버지가 무덤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아우가 형에게 보낸 인생의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다.
형!
어제 형님이 운명하셨다는 형수님의 전화 연락을 받고 아산병원에 달려갔습니다. 형님 영전에 헌화를 하고 하나님께 명복을 빌었습니다. 형님은 저하고 일치되는 점이 너무나 많네요!!! 형님 고향 대동감 이남 "겸이포" 제 고향 대동강 이북 "강서" 직선거리 약 50리 흔히 말하는 1.4 후퇴(실은 1950년 12월 2일) 형은 24살 나는 22살 내려와 원주에서 양복점 할 때가 1954년이고, 형수님과 우리 집사람이 소초 초등학교 동창, 기독교 교회 직분 권사.
나는 형님의 도움으로 서라벌 양복점을 같이 하게 되었고 우리는 친형제 이상으로 서로 의지하며 나는 내 친형 교섭형님보다 더 형님을 좋아했습니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서로 "할 말 못 할 말" 스스럼없이 다하고 내 버팀목이 되었던 형!!! 당시 원주는 군사도시, 나는 형님의 "보디카드" 그 시대에는 슬픔과 외로움, 한을 달래기 위해 연회(술자리)가 많았습니다.
형님의 애창곡 "백마야 울지마라" (노래 명국환)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데
거치른 타관 길에 주막은 멀다
옥수수 익어가는 가을 벌판에
또 다시 고향 생각 엉키는 구나
백마야 배가야 울지를 마라
곡절마다 심금을 울리며 넘어가는 애절한 노래!!! 연회석 자리에서는 재청이요!!하는 소리.
그 시절 그리워라 그리운 우리의 추억!!!
다리 건너 도립병원 문병가든 일, 취영루에서 중국 요리, 남포옥 갈비냉면 먹던 일.
형!!! 우리는 죽어서도 같이 살자!! 내 들어갈 무덤은 동화경모공원 평남 A-4. 5별 35호 아파트야!! 우리 신권사가 12년 전 먼저 가서 집보고 있어. 형님 아파트는 황해도? 번지는 몰라!! 오늘 확인하고 우리 신권사 기일이 9월 18일이야!! 형님 기일하고 하루 이틀 사이데 뭐?~~ 우리 신권사 보러 가면 형한테 꼭 들를게! 알았지!! 기다려!! 나도 곧 죽으면 우리 같이 살자 이 동래가 참 살기 좋은 데야!! 꽃동산이야!!! 형!!! 잘 있어!! 나도 곧 갈게 그 땐 영원히 같이 살자!!
2015. 09. 23. 김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