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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Oct 24. 2021

손오공의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이유 




열거하는 일은 줄줄이 나열하는 일. 


열거를 하려면 일단 재료를 모아야 하고 모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해. 




서점에 갔다가 샛노란 배경에 화초 사진이 박힌 사진집을 만났다. 생명력 넘치는 표지와 다르게 안에는 흑백 사진이 가득하다. 그것도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의 사진이다. 뼈가 다 드러나 앙상한 할머니가 있고, 그 다음 장에는 가족들과 함께 병상 위에서도 웃고 있는 아저씨가 있다. 생명도 흔하고 죽음도 흔하다. 근데 그 별 것 아닌 것들을 한 데 모아 놓으니 별 것이 되어있다. ‘Unfinished life’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다 보고 나는 싱숭생숭해 졌다. ‘싱숭생숭’, 그것만으로도 좋다. 




‘열거’에 대해 생각한다. 집요하게 관찰해 온 것들을 ‘시간’ 순으로 열거하면 ‘서사’가 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꼼꼼히 열거하면 ‘묘사’가 된다. 그렇게 세상 모든 작품의 뼈대에는 ‘열거’가 있다. 하나의 표본만으로는 맥아리 없던 주장도 '집단'이 되면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



'작가'는 개별적인 것들의 거대한 연대를 중개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한명 한명의 고유한 목소리와 사연을 모아서 더 높은 '의미 단위'로 가공하는 일. 수집과 나열은 결국 연대의 마음이다.



물리적으로 한 장소에 모여 줄지어 연설하고 증언하는 것과 같은 효과로, 한 명 한 명의 컷을 이어 붙이고 '책'이라는 공간에, 혹은 '영상'이라는 세계에 모이게 해주고 손잡게 해주며 서로 한 목소리를 내게 해주는 것이다.



손주들을 모아 놓고 일 평생 수집한 우표를 한 장 한 장 꺼내 놓는 할아버지를 상상한다. 할아버지의 볼이 발갛다. 한 쪽 볼은 우표에 대한 사랑으로 발갛고 다른 한 쪽은 손주들의 반응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발갛다. 그 할아버지의 마음이 ‘서사’를 완성하는 소설가의 마음이고 '10년'의 취재도 마다하지 않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은 드래곤볼을 악착같이 모으는 손오공을 닮았다. 작가들은 두 호주머니에 가득 담아 온 드래곤볼을 책상 위에 와르르 쏟아 놓고 마음 졸이며 밤새 바느질을 한다. 밤새 완성 된 작품을 보면, 그 간 고생이 보여 ‘싱숭생숭’해 진다. 




별 것 아닌 것들이 모여 별 것이 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계속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드래곤볼을 모으는 손오공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며 가끔은 임신한 친구들의 사진을 찍는다. 여성이라는 존재. 임신이라는 현상. 줄줄이 모아서 보면 더 큰 의미 덩어리가 되겠지. 적어도 ‘싱숭생숭’하겠지.   




‘열거’는 사랑의 기술이다. 사랑해야 오랜 시간 찾고 모으고 기다릴 수 있다. 세상 모든 손오공들이 가난에 허덕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손오공들이 찾아낸 별 것도 아닌 드래곤볼들도 모두들 행복했으면 좋겠다. 



'임신한 친구들의 몸에 대해 작업중인 사진 중'


'임신한 친구들의 몸에 대해 작업중인 사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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