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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Jul 23. 2018

30년 걸렸다

30년차에 인정하는 서울의 매력

요즘 참 이상하게 서울이 좋다.  



유명한 전시회만 열렸다 하면 바글바글 모여드는 사람들이 좋다. 까치발 들고 그림을 보려는 아이와 이게 무슨 미술이냐 욕하면서 찌푸린 미간으로 작품을 째리는 아저씨가 좋다. 누가 좋아하든 말든 신경 안쓰는 작품들을 위한 공간이 늘어나는 기세도 좋다. 서울은 아무리 아무리 찾아나서도 좋은 공간이 끝없이 발생하는 숨박꼭질의 도시다. 베를린에 한 달을 머물다 서울에 돌아와도 베를린이 그렇게 그립지 않았다. 베를린의 레트로한 공간들이 유럽의 오래된 가구들로 채워져 있다면 서울에선 빛나는 나전칠기 장롱을 테이블 삼아 술을 마실 수 있다(이태원의 문화주점 이야기다. 프릳츠의 양재역점에서도 오래된 장롱 인테리어를 만날 수 있다) 나만 알았으면 하는 공간들. 영원히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신은 다른 소원은 안들어주고 이런 소원만 기가 막히게 들어준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가게들은 곧잘 없어져버린다. 죄송합니다 사장님들.



원서동의 디자인 잡화점
효자동 근처의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
삼청동의 작은 갤러리




미세먼지 없는 날이면 한강에 텐트며 돗자리로 진을 치고 햇빛을 누리는 건강한 기회주의자들이 좋고 미세먼지 많은 이 놈의 나라 당장 떠나야 한다며 소리치는 술자리도 좋다. 얼마 전에 정말 존경하는 선배님을 만나 미세먼지 때매 여기서 애 낳을 수 있겠냐고 투덜거렸었다. 투덜거린 정도가 아니라 사실 내 조국을 저주했다. 이 나라는 씨가 말라야 한다. 더이상 아무 생명도 태어나서는 안된다. 그 생명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이게 나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제 50대에 접어든 선배가 그러더라. 나도 어릴 땐 이 독재국가에서 어린이가 자랄 수 있을까. 이 엉망진창이 나라에서 아이를 키워도 될까 생각했다고. 근데 지금 상상도 못한 일들도 벌어지지 않느냐고. 선배는 그렇게 나의 오만함을 지적해줬다.




맑은 날의 성북동
맑은 날의 창경궁 앞터



여기 자리에 앉으세요 하고 자리를 비켜드렸을 때 나 아직 그렇게 늙은이 아니에요 하며 손사레치는 할머니도 좋고 할머니 할아버지들 가득한 종로3가역에서 가슴골이 깊이 파인 옷과 타투를 입고 있는 여자가 좋다. 종로 2가 뒤로 들어서면 본격 모텔촌이 나온다. 모텔에서 쭈뼛쭈뼛 나오는 대학생 커플이 좋고 그 모텔 앞에 쭈구려 앉아 키득거리며 담배를 태우는 할아버지들이 좋다. 그런가하면 벤츠며 비엠더블유를 끌고 구도심의 좁은 골목으로 꾸역꾸역 들어와 모텔로 후다닥 들어가는 남녀도 볼거리다. 근데 또 그런 길 건너편엔 취준생촌이 있다. 익명의 취준생들이 모여 함께 공부를 하고 서로에게 조언을 던진다. 강남 학원까지 가기엔 멀고 돈 없는 취준생들이 모여 미래를 준비한다. 종로에 버거킹엔 젊은이들과 할아버지들이 한 데 섞여 감자튀김을 먹는다. 젊은이들은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고 할아버지들은 신문을 읽거나 멍을 때리고 있다. 지나가던 젊은 여자는 멍 때리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다리를 쳐다본 건 아닐까하고 할아버지를 실컫 쨰려봐준다.




탑골공원의 뒷 골목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종로의 안주인, 할아버지들
매일 파고다 공원 뒷편에서 벌어지는 장기판
종로의 여름
종로 오래된 이발소의 재밌는 시각디자인
단돈 2000원의 해장국 가게가 가득한 종로의 뒷골목
토요일 오후 2시, 만실인 종로의 모텔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들이 발에 치이는 서울이 좋다. 그 카페마다 시크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들이 있어 좋다. 나에게 커피를 건네 주는 그의 손가락에 커플링 대신 새겨져 있는 이름이 연인의 이름인지 묻고 싶었다. 점심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회사 때려치고 카페나 할까?라고 말하는 허풍이 좋다. 점심 후 아이스아메리카노에, 이정도면 이번 생은 성공이야라고 만족하는 느긋함이 좋다.



베지테리안을 위한 카페, 뿌리온더테이블
뿌리온더테이블의 느긋하고 아늑한 인테리어




나는 종로에만 30년째 살고 있다. 태어나자 마자 이 동네로 와서 한 번도 이사간 적이 없다. 최근에 북촌으로 이사 온 신혼부부 친구는 주말 마다 작은 말다툼을 한다고 했다. 회사 별 노조며, 협회며 사회적 약자들이 주말마다 차들을 막고 청와대로 향하는 동네라 그렇다. 남편은 그런 시끄러운 동네가 싫은데 아내는 그 점이 도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서 말다툼을 했단다. 나는 아내의 편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주말마다 교통 마비를 일으키는 행렬이 좋다. 차가 막히는 줄 알면서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좋고 그래도 저런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이 동네가 좋다. 서촌에는 오래된 농학교가 있는데 장애인 아이들과 함께 자랄 수 있는 이 동네가 좋다. 작년에 장애인학교 설립문제로 민관 간 갈등이 심했던 동네가 있었다. 농학교 친구들을 보며 자란 우리 동네 친구들을 보건데, 그건 반가워할 일이다. 공감하고 배려하는 능력은 학원다닌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장애라는 것은 가까운 데 있는 거라는 걸 아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다면, 그건 감사해야할 일 아닌가.




주말 마다 경찰들이 가득한 광화문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 선을 넘지 마시오



홍대와 대학가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을 지나, 강남과 한남동에서 잡는 약속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여대생을 본다. 남자가 여대생을 부축하지만 여대생은 일어날 힘이 없는 모양이다. 강북이 광화문을 센터로 이뤄진 아이돌이라면, 강남은 저마다 개성있는 멤버들로 가득한 그룹같다. 외모와 보컬을 맡은 센터가 있다면 얼굴이 썩 잘생기지 않았지만 유머감각이 뛰어난 멤버도 있게 마련이다. 강북은 그렇게 여러가지 색깔이 균형을 맞춘 아이돌이다. 강남은 모두가 서로 더 이뻐지려고 애쓰는 걸그룹같다. 그런데 그래서 또 인기가 많다. 10명이면 10명 다 예쁜데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예쁜 걸그룹들의 높은 콧대만큼이나 높은 빌딩들로 가득한 강남을 경멸하던 때도 있었다. 종로 30년의 고집으로 강남 친구들을 강남촌것들이라 무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빌딩숲 뒤에 숨어있는 골목골목의 주택들도 좋고 강북과 달리 언덕이 많이 없어 자전거나 스케이트보드를 잘 탈 수 있는 길도 좋다. 신사동에 가면 얼굴을 갈아 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당당하게 쇼핑을 하며 돌아다니는데, 저들에겐 이곳이 더 나은 삶으로 가는 터미널 같은 곳일거라 생각하면 그 또한 뿌듯하다.






어쩌면 서울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이 바뀌었나보다. 답답하고 싫었던 것들이 다 좋게 느껴진다. 얼마전 서울 공간연구소 사람을 만났는데 본인은 ‘다이나믹 서울’이라는 옛날 서울시 슬로건이 참 좋았다고 했다. 유럽 사대주의에 빠져있던 나는 오래된 것을 보존해야하는 게 아니냐고 으르렁댔다. 그런 내게 그는 우리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고 답했다. 예전에 TV에서 한국 문화에 폭 빠진 외국인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기와로 만든 광화문 옆에 고층 빌딩이 있는 모습을 유럽에선 볼 수 없다고. 그리고 그 옆엔 능선이 끝없이 늘어진 북한산이 은근하게 곁을 데고 있다. 그래 뭐 하나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이 느낌이 서울의 매력이다.



30년이나 걸렸다.

그 매력을 온전히 인정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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