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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Apr 08. 2019

연습하면 되려나, 정원사의 마음.

꽃을 꽃 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싸이코패스 테스트가 한창 유행할 때,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라는 문장 앞에서 망설인 적이 있다. 싸이코패스가 되기는 싫었으니 웬만하면 정답을 말해줄 수 있었음에도 나는 솔직하게 '아니오'에 체크해야 했다. '꽃을 보면'이라는 전제 조건 조차 능동적으로 수행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언젠가 시들고 마는 것은 나라는 인간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다들 꽃을 주고 받으며 기뻐하는 것인가. 실제로 나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 '꽃다운 나이'인 10대에 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자란 나에게 꽃은 그닥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집 안에는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식물들이 여럿 있었고 마당에도 수많은 꽃과 채소들이 널려 있었다. 부지런히 식물을 양육하는 그들을 보며 자라서인지, 꽃은 노년을 보내기 좋은 소일거리라는 첫인상만을 남겼다. 그래서 선물로 꽃을 주는 일은 참 성의없는 선택이라 믿었다. 그 사람에게 주고 싶은 선물을 백 번 고민해도 답이 없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보루같은 그런 거 말이다. 그럼에도 졸업식이나 입학식에서 꽃 선물을 받는 데는 익숙해졌다. 어떤 친구는 꽃다발이 너무 많아서 옆에 어머니가 대신 들어주기도 했고 누군가는 꽃 하나 없이 졸업장만 들고 다녔다. 그래서 꽃이 없는 아이는 꼭 다른 친구의 꽃을 빌려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꽤 슬펐다. 꽃은 사랑받음의 상징이면서도 박탈감의 상징같았으니까. 그리고 이런 생각들을 되짚다보니, 절망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 나 싸이코패스 맞네.



천장이 높은 우리집엔 언제나 높다란 식물들이 가득했다



이제 어른이 돼버린 내게 꽃을 그리라 한다면, 나는 유니크한 화병에 꽂혀 있는 몇 송이를 그리겠다. 식물이 '힙함'의 필수 조건이 되어버린 건 꽤나 신기하다. 노년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인스타그램의 좋아요를 올리는 핵심 보조출연자가 되었다. 지금 내가 다니는 광고회사 식당에는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세면대가 하나 있는데 그 세면대에도 매일 다른 꽃병이 나타난다. 아마 인기 있는 데일리 꽃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는 걸 거다. 나도 중2병 감성을 졸업하고 찌든 어른이 된지 오래며, 또한 힙스터가 되기를 부인하는 힙스터 추종자이기에 그 꽃을 볼 때마다 그만 기분이 좋아져버린다. 이쑤시개로 이를 쑤셔대며 한 참 동안 오늘의 꽃을 쳐다본다. 안정감에 맥박이 차근차근 느려진다. 그러다 불쑥. 설국열차가 떠올라버렸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열차에 갇혀 수족관의 물고기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처럼(나의 현실을 1등칸에 비유하는 건 아니다. 현실의 나는 꼬리칸이다) 나도 회사에 쳐박혀서 이 꽃 한 송이로 봄을 느끼고 있구나. 요즘 내 생활이 이러하다 보니, 꽃하면 '쓸모'부터 떠올리게 된다. 특히 내 돈으로 꽃을 살 땐 매번 그랬다. 인테리어. 분위기. 기분. 장식. 기념. 있어 보이기. 힙하게 꾸미기. 꽃이란 자연도 아니, 아름다움도 아니, '재료'이자 '소품'이 돼버린거다. 그렇게 꽃의 쓸모만 생각하다보니 꽃 하나 사는데도 고르고 또 고른다. 그러다 어차피 1주일 뒤면 죽겠지라는 생각에 그냥 꽃집을 나와버리는 나다.



BETWEEN BIRTHDAYS 서아현 작가 작업 촬영
BETWEEN BIRTHDAYS 서아현 작가 작업 촬영



지난 겨울, 플로리스트인 지인이 사진 촬영을 부탁해왔다. 사실 난 자연 사진을 별로 안 찍는 편이다. 허세냐고 하겠지만 나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구글에 검색했을 때 나올 사진은 내가 또 찍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나보다 좋은 카메라와 오랜 경력으로 찍은 자연 풍경이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나같은 아마추어가 복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꽃이라는 피사체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백과사전에 꽃의 종과 목을 검색하면 옆에 그럴싸한 사진이 있을 것인데. 그 시간에 내일은 또 달라질 얼굴의 주름과 뭐 그런것들을 찍는 게 더 가치있다는 생각이었다. 음, 쓰다보니 허세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지인의 작업실에 도착하니 나같이 더럽고 미천한 생명이 여기 발을 딛여도 되나 싶더라. 가운데 손가락이 달린듯한 꽃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아주 귀했다. 꽃의 색은 왠지 모르게 야시시했다. 관능적이라는 어려운 말보단 야시시가 맞겠다. 예전에 내가 존경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선배님이 망고를 잘 못먹겠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유가 아주 요란하고 신기했는데 망고 맛이 너무 야해서라는 거다. 대체 뭔소린가 싶었지만 이 꽃을 보니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남들한테 설명은 못하겠는 야시시함. 그 옆엔 기다라고 야윈 가지 끝에 잎사귀가 간신히 나있는 녀석도 있었다. 거기 맺혀있는 초록색 봉오리는 아직 잔뜩 웅크리고 있어 열매인가 싶기도 했다. 그 야윈 아이가  흰벽을 가로질러  솟아 있는데 흰 벽에 분열이 생겼다. 그림자. 여백. 그 야윈 가지 안에도 무늬가 있고 결이 있구나. 대단한 녀석이구나.


오랜만이었다. 그냥 꽃을 꽃으로 본 일이. 내 방을 꾸밀 재료도 아니고 사무실 분위기를 화사하게 해 줄 조력자가 아닌 그냥 꽃. 아니 생명체.



BETWEEN BIRTHDAYS 서아현 작가 작업 촬영


"이건 마사지라고 하는 거에요"

꽃의 줄기를 조물조물거리며 지인이 말했다. 꽃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때 쓰는 기법이라고 했다. 꽃들도 맛사지를 받는다니. 웃음이 났다. 손끝의 체온이 꽃에 전해지자 줄기가 말랑말랑해지고 조금씩 방향을 바꿨다. 인심도 참 좋다. 가위질을 하고 물 속에 꽃을 놓아주고 지인의 손은 점점 바빠졌다. 꽃의 줄기만큼 야윈 손이 정교하고 진득하게 움직인다. 생명을 다루는 손이다. 다섯 손가락이 꽃의 잎사귀처럼 한 데 어울린다. 손도 관절부분은 더 어두운 색을 띈다. 꽃잎의 굴곡에 따라 색이 다르듯 둘은 참 닮았다. 카메라가 끝도 없이 다가가게 됐다. 손가락들과 거대한 꽃이 화면 가득해지니 이건 뭐랄까. 외계적인 아름다움이다.



BETWEEN BIRTHDAYS 서아현 작가 작업 촬영
BETWEEN BIRTHDAYS 서아현 작가 작업 촬영


BETWEEN BIRTHDAYS 서아현 작가 작업 촬영


어릴 때 우리 집 옆에 놀이터를 만드려다 실패한 작은 땅이 있었다. 할머니는 그 곳에 처음엔 꽃을 심었고 나중엔 호박이며 오이며 부추도 심었다. 그 옆에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할머니가 나를 잡아다 밭일을 시키면 짜증내면서 돕다가 아카시아 향이 뭔지를 배웠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나면 향기는 금방 죽어버렸다. 나는 그 찰나의 향기가 너무 감질맛이 나서 미울 지경이었다.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요란을 떠는 사이에도 할머니는 묵묵히 땅만 가꿨다.


1년 전 벚꽃이 필 때 도쿄에 갔다. 벚꽃이 만발한 신주쿠 공원 앞에 작은 화초들을 파는 수레가 있었다. 일본 할머니 무리가 그 수레에 꿀벌처럼 몰려들었다. 바로 몇 발짝 앞에 거대한 벚꽃 나무들을 앞에 두고. 할머니들은 하나 같이 꽃을 좋아한다. 피고 지는 꽃의 생을 이미 살아본 사람인지라. 인테리어를 할까 선물을 할까, 꽃의 구실부터 생각하는 나와는 출발부터 다르다. 나처럼 꽃이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겠지. 그건 자연스러운 거니까. 할머니들도 할아버지들도, 꽃을 꽃 자체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사는 이유다. 지인이 꽃 줄기를 조심스럽게 맛사지 해주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듯이 조물 조물. 그 애정은 내가 우리 강아지가 언젠가 죽을 걸 생각하며 슬퍼하고 그래서 더 잘해줘야겠다 결심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다. 죄책감과 언젠가 닥칠 소멸에 대한 불안. 그런게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과 향기와 야시시한 색깔과 여백, 그림자. 그 모든 것에 충실한 마음. 순간을 가꾸는 마음. 정원사의 마음이다. 정원사의 마음으로 살면 나도 다음 테스트에선 당당히 싸이코패스를 탈피할 수 있을텐데. 연습하면 되려나.



2018년 일본, 봄.
2018년 포틀랜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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