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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윤 Oct 24. 2021

오늘의 서식지

나는 지금 '예쁜집'에 살고 있을까




‘오늘의 집’이라는 앱에 자주 들어가 봅니다. 아직 이사한지 얼마 안됐거든요. ’오늘의 집’이라는 로고 옆에 ‘누구나 예쁘게 살 수 있어’라는 카피가 눈에 띕니다. ‘예쁘게’라는 단어를 브랜드의 목소리로 들으니 괜히 피곤해집니다. ‘예쁘게’라는 상태는 참 어려운 상태입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능동적으로 지켜내야하는. 하물며 김구라씨도 촬영 내내 분칠을 하시는걸요. 예쁜집에 살고 싶지만, 나의 집에서 긴장은 내려놓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의 집은 늘 지저분하고, 때로는 예쁘지만 대부분 예쁘지 않고 맙니다. (버섯 조명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서식지 옆으로는 기찻길이 흐릅니다. 의외로 KTX보다 지하철이 더 시끄럽습니다. 왜일까요.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느리게 달리는 게 더 힘든가봐요. 출발하자마자 멈춤을 생각해야하니까요. 집들이를 왔다가 기찻길 소음을 들은 친구는 “브루클린에 사는 예술가 집같아”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왠지 도쿄에 온 것 같다”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시끄러워서 심심하진 않겠네”라고 말했고 언니 부부는 “먼지가 심할테니까 하루에 한 번은 청소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 임원 남성은 제 이사 소식을 듣고서 “기찻길 옆에 살면 애를 많이 낳는다고 하잖아”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람 좋게 웃고 말았습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는 것. 내 서식지의 하루도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갔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남향집 전세가 나올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어요. 집을 보러갈 때마다 “여기가 서향인가요?”라고 물어보면 중개사분들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북향이에요..”라고 속삭였습니다. 세상에는 북향집이 참 많았습니다. 그쵸, 25%잖아요. 다음 지구에는 북향집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사 오기 전 집에는 해가 들지 않았습니다. 남향이었지만 앞에 있는 오피스텔이 햇빛을 온몸으로 막아냈습니다. 낮에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어쩌면 나의 서식지는 공중 화장실 한 칸 보다도 사적이지 못했습니다. 물론, 나중엔 ‘볼테면 봐라!’라는 마음이었지만.






어두운 집의 장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낮이나 밤이나, 저희 오복이(반려묘)의 동공은 늘 확장되어 있었어요. 어두울 때 고양이 눈이 제일 귀여운 거 아시죠? 막상 남향집으로 이사오니, 오복이의 동공은 늘 파충류처럼 가늘어졌습니다. 집이 밝아졌으니까요. 이사오는 길에, 너의 써클렌즈를 떨어뜨린 모양이구나! 저는 오복이가 좀 낯설어져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서식지는 1층에 쓰레기장이 있습니다. 이 전 서식지는 지하 2층 주차장에 쓰레기장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쓰레기장이 ‘오너 드라이버’를 위한 동선에 있었다면, 지금의 쓰레기장은 뚜벅이들을 위한 동선에 있습니다. 나는 이 전보다 분명 존중받고 있습니다. 뚜벅이인 나는 훨씬 자주 쓰레기통을 비우게 되었고 나의 서식지는 좀 더 깨끗해졌습니다. 지금 나의 서식지는 이전보다 적당히 큰 부엌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설거지를 더 자주하게 되었고 왠지 과일도 더 자주 먹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의 서식지의 환경과 생식이 변했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 모양의 삶을 살고, 빌라에 사는 사람은 빌라 모양의 삶을 사나봅니다. 나는 지금 기찻길 소음이 들리는 햇살이 들어오는 삶을 살고 있어요. 마치 내가 타고난 유전자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는 것처럼. 서식지가 나를 결정하고 있어요.




지난 서식지에서 짐을 정리할 때, 물감 한 세트를 버렸습니다. 대부분 굳어버렸더군요. 그 중에서 아직 말랑말랑한 물감들을 짜서 캔버스에 마구 칠했습니다. 제목은 ‘생존’으로 정해봤어요. 오직 살아남은 물감들로만 칠했으니까요. 저와 오복이와 그림은 잘 살아남아 새로운 서식지에 정착했습니다. 이 곳에서는 오래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존> 이라는 그림입니다.



202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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