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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안 Jul 30. 2019

사랑하지만 잊은 듯 살아야 할 때

후달림의 삶으로 다시 돌아오다.

  너무 사랑하지만 잊은 듯 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어느새 2년 하고 반절이 조금 넘었다. 나이를 두 살이나 더 먹고서도 어느새 내년과 더 가까운 지금에서야 먼지 풀풀 날리는 그 마음을 꺼내 툭툭 털며 기침을 해댔다. 뭔가 정확히 잡히지는 않지만 시간을 돌이켜보자마자 하루하루가 막심하고 내 것 같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꼭 꼬집어보자면 지금 이 순간도 그저 다르지 않음에 또 나 자신을 마주 보고 어쩌지 못하는 주먹으로 어깨를 투욱, 친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지친 듯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탓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할까, 챙길 수 있을까, 그 마음을 알아줄까.' 하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돌이키니 웃긴다. 지난날에는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누가 내 마음을 알까.'라고 늘 소리쳐왔던 나였다. 그것이 이제는 어찌 되었든 '남'보다는 '나'가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그동안 나 스스로를 너무 외롭게 놓아두었던 나에게 이제는 그냥 '외롭든 어쩌든 그저 그렇게 살아보라'라고 하는 판이다. 뭐 딱히 든든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것은 나 스스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던 시간을 지나 내게 뾰족하게 날을 갈고 생명과 호흡을 위협하던 손가락을 고이 접어 주먹으로 얄궂게 어깨를 투욱, 하고 치는 그런 것이다. 마치 이것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이와 차마 다 나누지 못하는 말을 그저 그런대로 흘려보내는 그냥 그런 것이다. 어쩌면 이제는 그냥 그런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다시 돌아온 것이 사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자꾸 확인하고 그것을 이제는 잡아도 되느냐며 스스로 초조해한다. 그런데 사실 돌이켜보면 원래 그것은 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놓아버린 것도 나의 선택이었다. 사람 살아간다는 것이 한 눈으로 십리길이 훤히 보인다면 물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늘 원망스러운 것은 나의 삶은 현재에 있다는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도 그것 자체가 이내 곧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그것은 절대 과거가 되어버린다. 이 사실은 나를 하염없이 무력하게 만든다. 그 어떤 커다란 존재가 있어 이러한 흐름을 만들어낸 걸까. 우리는 과거를 만들고 미래를 예측하지만 우리보다 더 완벽한 존재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조절하는 그런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력한 존재이기에 그저 순간에 목이 매인 상태로 딸꾹질을 남발하며 산다.  


  그동안에도 그렇고 현재 지금도 나름 꾸준히 생각해왔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일들은 계속 만나고 있었다. 그냥 예를 들자면, 글 쓰는 것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보자. 자유로운 글. 나는 나를 담뿍 담아 표현하는 그런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졸업을 위해 논문을 쓰는 것이다. 단 한 줄도 나로부터 태어난 본연의 문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결과를 인용하고, 그것의 꼬리표를 달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자취를 그렇게 남긴다. 실험과 과정과 결과를 그 자체로 기술하며 그것에 대한 증거를 숫자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나보다 더 권위 있는 이들에게 수없이 확인을 받는다. 그들의 논리를 담아 또 풀어낸다. 그 과정이 반복된다. 단 한 줄도 임의적인 나에게서 나온 것이 없어야 하기에 나의 의견을 지지해 줄 다른 이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논문은 어쩌면 조금 더 탄탄한 것이겠지만 어쩌면 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나의 이름을 달아 그것은 공인된 절차를 거쳐 공적화되는 그런 것이다.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은 나를 엄청나게 수치스럽게 한다. 줄타기를 하며 모든 과정을 아슬아슬 거쳐간다.


  어쨌든 자유로운 글을 쓰는 것과 논문을 쓰는 것은 '쓰는 것'이므로 비슷한 형태를 가진다. 내가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사용하여 자유로운 글을 쓰는지, 논문을 쓰는지 나를 외형적으로 보는 이는 아마 그 차이를 포착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쓰는 중인 본체는 완벽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고의 방식도, 움직임의 방식도, 눈의 흐름도. 모든 것은 반대의 행위이다. 그러한 어마어마한 과정을 지나쳐 조금은 마음을 놓아본다. 그동안 고생한 노트북을 쓰다듬으며 조금은 사이가 데면데면해졌음을 느낀다. 화해의 의미로 도닥도닥 키보드를 두드리면 생각보다 부드럽게 담기는 손 끝의 감촉을 느끼며 '아 이게 원래 이런 느낌이었구나'를 떠올린다. 화해 이전의 키보드는 그냥 손목 염좌의 주범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주절주절, 그것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다. 아깐 예를 들었지만 사실을 예가 아니고 그냥 나의 지나왔던 사실이었다. 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또는 가상의 이야기로 풀어내면 마음이 훨씬 더 많이 편해진다. 그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다. 가끔은 나도 내가 남과 같았으면 좋겠을 때가 있다. 무언가 나를 완벽히 책임질 수 있는 그 존재가 나를 알아서 잘 되게끔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예측이 되는 미래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예측조차도 쉽게 할 수 없을 때 그냥 내 인생을 시냇가에 떠내려가게 툭 빠트리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지나칠 생각을 오랜만에 두드려보며 안도한다. 이렇게 한다고 누가 잘했다고 돈을 준다거나, 칭찬을 해주지는 않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도 불안의 요인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살 때 가장 즐거운 사람이다. 남들에 비해 후지고, 뒤떨어져 보이고, 한심하다고 여겨질 것이 다분하다. 대단하진 않아도 그냥 그렇게, 저렇게 소소하게 살아야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하루, 그저 감동과 감탄으로 나 자신과 마주 보며 배꼽 잡고 웃음 짓는. 그래 거지가 되면 그때 후회하지 뭐. 딴엔 후달리지만 조금만 더 있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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