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녕안 Sep 24. 2023

그렇지, 채널 6번 노이즈는 나만 알지?

   살면서, '나는 그럴 일 없겠지'라고 생각했던 일 중 하나는 바로 '서울, 경기가 아닌 곳에서 사는 일'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는데 놀러 가는 게 아니면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 글을 적고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이곳은 바로 '경상북도 포항'이다.


   나는 서울에 사는 것이 당연하거나 익숙한 사람은 아니다. 경기 어디 즈음에 붙어있는 조용한 도시에서 태어나 그 근처의 도시 즈음으로 이사를 다니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텔레비전을 볼 땐 지역방송국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규 방송을 비롯해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면 아주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을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채널은 바로 6번이었다. 분명 7번이나, 9번. 그리고 11번과는 달리 너무나도 세련되게 느껴지는 만화들을 틀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화면과 오디오에 노이즈가 너무 심했다. 그때 어른들께 이 채널은 왜 안 보이냐고 물었더니 이건 '서울'방송이라고 했다. 여긴 서울에서 멀어서 노이즈가 타니 보기 힘드니까 다른 채널을 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그 서울방송인 채널 6번을 좀 참고 시청하려 노력해 보았다. 그러면 꼭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아주 어렸을 적에는 볼 수 없었던 채널 6번이 경기 지역에서도 문제없이 볼 수 있는 채널이 되었다. 그 후 얼마 더 지나 그 채널의 번호는 13번이 되었다. 어느새 나는 '서울 방송'시절의 기억을 삶의 저편으로 아득히 넘겨 버렸다. 그즈음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곧 마포에 작은 신혼집도 꾸렸다.


  결혼 전 경기도에서 서울로 학교를 다니던 것은, 물론 즐거운 일이었지만 매일 통학시간이 왕복 4시간이었던 일은 그다지 즐거운 일이 될 수 없었다. 특히 학부 시절 광진구에 위치한 학교를 가기 위해 매일 사당을 거쳤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미화될 수 없는 기억이다. 그나마 석사 과정 때에는 신촌으로 통학을 했는데, 이 때는 아예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경의 중앙선으로 곧장 신촌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좀 나았다. 어쨌든 경기에서 서울로의 통학은 죽을 것 같이 멀었고 힘들었다. 복작, 복작한 서울 한가운데에서 수도 없이 지하철을 거꾸로 탔고, 환승 위치를 잘 못 찾아 몇 번을 서성이며 헤맬 때가 많았다.


  하지만 결혼 후 서울에 살게 되어 얼마나 흥겨웠던지. 성산동에 위치한 오피스텔에서 신혼을 시작했던 나는 바로 논문 학기를 맞이했다. 교수님께 지도를 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의 경우들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소화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서울에 살지 않았다면.. 나 논문을 쓰지 못했을지도?'라고 생각하며 매번 감사하며 살았다.


   한 번은 남편에게 채널 6번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오빠, 나 어렸을 적에는 SBS가 6번이었는데 노이즈가 너무 심해서 볼 수가 없었어." 강남 8학군 출신인 남편은 무심하게 "그때는 서울 방송이라 그럴 수 있겠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노이즈의 모습을 아주 선명히 기억하는데. 괜히 차별받는 세상에서 살았던 것 같은 마음에 부아가 치밀어 남편에게 내 상황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며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만화가 노이즈에 가려 철저하게 채널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설명했다. 6번을 볼 수 없었던 나, 이제 당당히 서울 시민이 되었다는 것에 방점을 두며 말이다.


   그런데 내 운명이 서울에 진득하게 살 운명이 아니었던 건지,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남편 덕분에 자주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은 서울을 떠나 산다는 것에 대해 큰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어쩌면 서울 살이에 애정이 없었다. 복잡한 길, 어딜 가나 많은 인파, 비싼 주차장 이용료, 높은 물가 등등.. 뭐 하나 좋은 게 없다고 했다. 서울 외곽으로 조금만 빠지면 훨씬 쾌적하고, 훨씬 인간답게 살 수 있는데 애매하게 서울이라고 꽉꽉 꽁기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다. 2017년 당시, 광어회 1인분을 시키면 만원이긴 했지만 8조각이 나오는 게 이거 먹고 사람이 살겠느냐고 말했다. 공감은 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나는 합정이 좋았다. 상수가 좋았다. 월드컵 공원으로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다니는 게 좋았다. 우리가 같이 함께 시간을 쌓았던 좁은 골목들이 좋았다. 하지만 나의 의견과는 별개로 삶을 살아야 했기에 남편이 어떤 지역의 현장에 발령을 받느냐에 따라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 5년의 기간 동안 마포에서 1년을 조금 넘게 살다 의왕시에서 1년 반 꽤 넘게, 고양시에서 2년 좀 안 되게 지냈다.


 

   남편은 요즘 난리라는 그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만드는 공장을 짓는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먼저 포항에서 숙소 살이를 시작했다. 알고 보냈지만 막상 서운했던 나는 가족의 양해를 구하고 친정에서 두 달을 지냈는데 그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 다니던 직장은 다닌 지 고작 1년이 좀 넘어가던 차였다. 이젠 서울에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벗어난 일이 되어버렸다. 전국구를 유랑하며 다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내년 1월엔 입주할 아파트도 있었다. 입주를 포기하고 세를 준다고? 새 아파튼데? 그렇다고 포항에 한 10년은 사느냐? 그것도 아니었으니 더 문제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일을 그만 두면, 포항에서 일을 연결해서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모든 걸 다 버리고 간다라는 말이 솔직히 맞는 말이지만 조금 가볍게 생각하려 했다. 그러니까 남편 없이 나 혼자 좋은 집에 살면 뭐 하나. 하지만 나.. 놀러 가 본 적도 없는 포항에 내려간다니.


   이사하는 날. 고양시에서는 분명 날씨가 화창했는데 포항으로 내려와 사다리차를 건 순간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다가 있는 동네라 확실히 습기가 어마어마했다. 이삿짐센터 직원분들은 굉장한 습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포항에서는 집을 구하는 단계부터 울고 싶었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결국 남편과 약간의 트러블도 있었다. 하지만 오래 지속하지 않았다. 우리의 선택지에 이런 싸움은 특별한 의미가 없으니까. 그저 어마어마하게 덥고 습했던 포항의 날씨에 굉장히 취약했던 남편과, 내 나이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파트가 너무 좁고 구조가 엉망이었던 탓에 커다란 냉장고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너무 열받았던 내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환기할 수 있었던 작은 계기였다.


   이사 후 한 달 하고도 4일이 지났다. 이제는 더위가 많이 꺾이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가 되었다. 집은 정리가 거의 끝나 사람 사는 집이 되었다. 앞으로 짧으면 1년, 길어봤자 2년 정도 살 계획인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명절이 와도 식구들이 오지 말라 성화시다. 차라리 나중에 날 좋을 때 본인들이 내려오시겠단다. 아무래도 진짜 오시게 되면 집이 좁아 숙소를 예약해 드려야 될 것 같다. 냉장고 때문에 집이 아주 좁아져서 말이 아니다. 일을 그만두니 집안일을 굉장히 열심히 하게 된다. 포항에는 여자들이 직장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 간단한 알바도 단 한 통의 연락이 오지 않는다. 그냥 그래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콩나물국 잔뜩 끓여서 냉장고에 쟁여놓고, 개 산책하고, 넷플릭스랑 유튜브 보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겪었던 모든 단점들 이곳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다. 매일같이 드나들던 '서부간선지하도로'와 '성산대교'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아주 잠시였지만 괴로웠다. 아, 남편은 의외로 경상도 입맛이었고 나는 좀 안 맞아서 요즘 남편으로부터 입맛이 까탈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속 편한 사람은 모르지 내 맘. 그렇지, 채널 6번 노이즈는 나만 알지? 맨날 나만 시커멓게 타지.. 그렇지..


포항 2행시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포 : 포항은 도시도 있고,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촌도 있는데, 재미가 좀 없...

항 : 항시적으로 재미 찾는 중.....









매거진의 이전글 '입'은 참 많은 것들이 오락가락하는 통로가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