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젖은 운동화가 생각난다.
요즘 하늘도 우중충하고 바람도 눅진하고 꿉꿉한 것이 여간 몸을 무겁게 한다. 어릴 땐 비가 좀 콰르릉콰르릉 천둥번개와도 좀 동반해서 와주었고, 죽죽 끊임없이 물난리가 나게 한 달을 내리쳐야 장마였는데 요즘은 장마랄 것도 없고 그냥 다 '올해의 장마설' 또는 '장마(였다) 카더라'정도로 그치는 것 같다.
나는 어릴 적 언젠가부터는 운동화가 꼭 하나만 있었다. 의도해서 그렇게 사주신 것도 아닌 것 같고, 샌들이나 슬리퍼가 있긴 했지만 중학생이 되고 나서 샌들을 신고 학교에 갈 순 없었으니까 자연스레 맨날 신는 운동화만 신게 된 것 같다. 성격도 좀 무던한 탓에 신발이라는 것은 그저 양말 다음에 신는 것 이상의 의미도 없었다. 매일매일 신는 신발을 그냥 신을 뿐이었다. 그런데 운동화가 하나인 것이 아쉬울 때가 언제냐하면 '비가 올 때'와 '운동화를 빨아야 할 때' 이 두 순간 이었다. 그럴 때가 되면 항상 불평불만을 하며 '나도 운동화가 한 켤레 더 있으면 좋겠다'부터 시작해서 이미 인터넷으로 서칭 한 후 '사고 싶은 운동화를 골라놓는' 방정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운동화를 빨아 널으면 어찌 되었든 잘 말라서 곧 다시 신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운동화를 사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운동화가 한 켤레 더 있었으면 아마 젖은 운동화는 빨지도 않고 처박아두고 다른걸 신고 다녔었겠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필요하다고 바로바로 사주시는 편은 아니셨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단 사용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을 더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나는 사춘기 때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러한 양육방법이 '나 같이 돈 써대는 거를 신나 하는 방탕아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부모님이 뜻을 말씀하신 이후 크게 반항하거나 그냥 수긍하는 척이라도 해야 뭔가 집안이 조용할 걸 알기에 나름 운동화에 대해서는 꽁 하고 은근히 마음에 담아두기도 하고 지낸 시절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설명을 드려서 왜 이 운동화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얻음으로써 내가 어떤 모습으로 더 부모님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건지 등의 그러한 설득을 하는 방법을 왜 생각지 못했나 싶다. 사실은 울보라서 괜히 자존심 상하게 눈물이 나와서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니까 안 한 거지만 말이다. 요즘도 괜히 서운함만 올라오는 일에는 눈물이 앞서기 때문에 그때와 지금이 달라진 건 없다. 아직도 아기 같은 모습만 보여드리는 게 답답하기도 하다. 유독 가족 앞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빵집 아르바이트할 때 서운 한 건 야물딱지게 잘 따졌는데...)
어찌 되었든 비 오는 날 운동화를 신고 길을 걸으면 희한하게도 내 운동화는 유독 비를 잘 흡수하는 모양이었다. 겉 표면이 가죽 느낌의 신발이어도 틈새 사이사이로 어찌 그렇게 빗물이 가득해지는지 또 신발을 집에서 다 빨고 말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초록 수프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괜히 쓴 물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반면에 열심히 빨아서 깨끗한 운동화에 신발끈을 끼우면 어쩜 그리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마치 새 신발을 장만한 기분이었을까? 아마 나도 그런 점에서 차라리 젖어버린 신발 더 첨벙첨벙 거리며 빗속을 발로 차며 다니기도 했다. 엄청 재밌다. 뭔가 비를 온몸으로 맞서는 자유로운 모습에 낭만이 있는 것 같은 착각?
지금은 선물도 많이 받고, 또 내가 구입한 운동화도 여럿 있어서 왜 이리 신발이 많지? 하며 신발장을 볼 때마다 스스로 뜨끔 하긴 하지만 이제는 신발이 그렇게 많아도 비를 직접 차고 다니진 않는다. 비가 오면 예전 어릴 때 생각이 나면서 시도해볼까? 싶지만 운동화를 세탁하는 일은 꽤 지긋지긋한 추억이기도 하기 때문. 나도 이제는 낭만과 즐거운 시도보다는 귀찮은걸 피하고, 줄이고자 하는 마음밖에 없는 무덤덤한 사람이 되어버렸나 보다. 아쉬운 생각이 들면서 씁쓸한 면도 한 구석 생겨 올라온다. 하지만 이제는 비가 오고 꿉꿉한 바람이 불면 그냥 집에서 청소하고 샤워한 후 따뜻한 차나 마시면서 혼자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