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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Apr 16. 2024

엄마, 사실은 보고 싶었어.

회상 2

엄마를 만났을 때였다. 나는 엄마가 들고 있는 우편물에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우편물에는 익숙한 듯 낯선 이름이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최성례" 나는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며 엄마가 말하는 내용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이름이 누구였는지에 골몰했다. 그 이름의 정체는 한참 뒤에, 집에 가는 길에서야 생각이 났다. 그 이름은, 엄마의 이름이었다.


"미친 여자는 엄마가 아니야"

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 할머니와 고모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얼마나 엄마가 문제가 많은지 말하곤 했으니깐. 그러니깐 내 딴에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 꽤나 용기를 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웬일로 고모들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의 용기는 헛된 것이었다.


"저희 엄마는 정신병원에 있는데요"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 한 명씩 엄마와 아빠는 무슨 일을 하는지 선생님 앞으로 나아가 이야기를 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엄마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학교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그리고 그 수업 시간이 끝났을 때, 아이들은 우르르 나에게 몰려왔다. 초등학교 1학년들에게 정신병원이라는 곳은 새롭고도 신기한 존재였다.


"배가 아파서 다시 입원했어"

그리고 내가 다시 2학년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너희 엄마 아직도 정신병원에 있느냐고. 내가 엄마가 정신병원에 있다고 말한 이후로, 고모는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런 얘기는 누구한테도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정말 친한 친구 한 테도요?'라고 되물었을때, 고모는 '응, 누구한테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정말로 그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이 없다. 이제 막 여덟 살 된 아이에게 말한 것 치고는, 그 효과는 굉장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어도 누군가는 나에게 물었다. 너의 엄마 아직도 정신병원에 있느냐고. 나는 엄마는 다 나았는데, 아파서 다시 입원을 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다시 물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나의 대답은 궁색했다. 배가 아프다고.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아픈 곳은 기껏 배가 아픈 것이었다.


참으로 진지한 정신병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조현병. 예전에는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을 가진 병이다. 나머지는 그냥 기분이 좋지 않을 뿐이다. 불안장애와 우울증 약을 먹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약을 먹으면 해결되는 것이다. 다만, 조현병만큼은 그렇게 해결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그냥 미쳤다는 표현으로 일컬어지던 이 병은, 여전히 알려진 정확한 원인이 없다. 다만, 유의미하게 유전의 영향이 있다는 사실만이 밝혀져 있다. 라는 내용은 대한민국 6차 교육과정의 윤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었다. 윤리 교과서의 그 단락과 그 단락에 첨부된 정신분열증 환자의 흑백사진을 보았을 때, 정신병원에 있다는 엄마는 정신분열증, 지금 말하는 조현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도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엄마를 정말 많이 닮았네."

내가 컷을 때, 정말 많이 컷을 때, 할아버지의 누님의 아들이 되는 분이 그렇게 말했다. 누구도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고, 내가 누구를 닮았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막연히 내가 누나보다는 아빠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덜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누님의 아들이 되는 분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이해했다. 나는 어머니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


엄마를 만난 것은 대학에 가기 전이었다. 여전히 할아버지, 할머니, 누나와 내가 살던 곳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시던 때에 집전화로 연락이 왔다. 그 집은 엄마도 알고 있었고, 집전화도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를 가장 싫어했다. 아버지의 인생을 망친 것은 모두 엄마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찌할 수 없어 보였던 손녀, 손자가 다행히 병에도 걸리지 않고, 키도 180이 넘게 크고, 학교에서 공부도 썩 잘해서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엄마가 죄가 없다고 했다. 안타깝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를 보게 되었다.


엄마는, 마치 나를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본 것처럼 행동했다. 눈물을 훔치며 사무치는 재회 같은 것은 없었다. 엄마는 약을 먹고 있었고, 몹시 산만했으며, 이 얘기를 했다가 저 얘기를 했다. 놀랍게도 엄마는 운전을 할 줄 알았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는 것은 불안했다. 운전을 해도 되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엄마는 산만하게 운전했다. 엄마는 마치 아기를 갓 낳은 수달이 새끼를 여기저기 자랑하듯 여러 사람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나는 누구누구라고 말하는 모르는 이들을 만나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엄마가 살고 있다는 집에도 들어갔다. 그곳은 어떤 가정이었다. 그들이 완전한 하나의 가족이었는지, 아니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합체였는지는 잘 모른다. 어쩌면 그 둘 다의 조합이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분은 나에게 말했다. 그의 말은 산만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는지를 말했다. 엄마와의 재회를 하며 나는 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제 막 대학생이었고, 돈을 벌기보다는 쓰는 쪽이었고, 엄마와의 재회를 다소 긴장하며 기대하였으나, 돈에 대한 얘기가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이야기를 꽤 길게 했으나, 나는 어서 이 자리를 떠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항상 비겁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컵라면 한 번을 사 먹어본 적도 없고, 세탁기도 없이 교복은 손빨래해서 입었지만, 그 정도는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었다. 나는 더 많은 것들을 감당해야 하는 죄를 짓고 태어났다. 할머니를 위해 설거지도 더 많이 하고, 운동화 빨래도 해야 했지만, 나는 그 시간을 책을 읽고 컴퓨터를 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엄마를 만나 감격적인 재회를 기대했지만, 엄마의 생계를 담당하는 교인들에게 비용 부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나는 또 배신을 했다. 고작 일곱 살 된 아이가, 엄마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하던 아이가, 고작 칭찬을 받고 싶어서 모두의 앞에서 "미친 사람은 엄마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나는 또 그렇게 말했다. "이 분은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이 분의 생계와 비용은 너네들이 알아서 해주세요. 저는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저는 충분히 어렵게 살고 있는 걸요." 말로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한 것과 같았다. 나는 다시는 엄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이 없어지고, 그 집의 집전화도 없어졌을 때, 엄마는 가족관계증명서상에 '사망'이라는 표시가 없는 것으로 생존을 알게 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내가 아빠가 되었을 때, 딸은 그렇게도 밤마다 울었다. 그렇게 울면, 안고 달래기를 매일 한 시간씩 했다. 딸을 안고, 섬집아기도 불러주고, 등대지기도 불러주고, 하늘나라동화나 아빠와크레파스 같은 동요들을 불러주며 토닥이면, 나는 좋았다. 딸을 안고 노래를 부르고, 울음에 지쳐 가냘픈 고개를 내 어깨에 묻고 잠드는 딸이 나는 좋았다. 어느 날은 힘들었다. 너무 힘든 날에는, 아빠 힘든데 왜 이렇게 우니. 라고 했다. 한번 화를 내었을 때, 크게 우는 딸을 보고 이틀을 내내 마음이 아팠다. 우는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었어 화를 냈을까 하며,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몇 달을 넘게 안고 달래고를 반복하며 생각했다. 다 큰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렸을 때, 이렇게 울면 누가 나를 안고 달래줬을까. 늦은 새벽, 울음을 잘 그치지 않는 아이가 잠들기 어려워하면 나에게도 안고 달래주는 누군가가 있었을까. 누가 나를 어루만지고, 누가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또 그러는 중에도 나에게 사랑스럽다고 말해주었을까.


어느 날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어릴 때 보던 둘리의 영상을 보았다. 둘리가 타임코스모스를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만났다가, 희동이의 장난으로 다시 현대로 돌아오는 영상이었다. 둘리는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만나자 말했다. "나는 이제 엄마랑 같이 살거야." "엄마, 보고싶었어"


내가 기억하는 나는 그 한여름의 어느 순간 이후로, 단 한 번도 2인칭의 '엄마'라는 말을 불러본 적이 없다. 어두운 밤, 할아버지가 라디오에 트로트도 틀어주고, 뉴스도 틀어주다 계속 우는 내가 답답해서 담배를 피우던 그 때에도, 나는 '잠이 안 와서' 울었다. 어린 나는 한 번도 엄마 보고싶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미친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둘리의 한 장면을 보았던 날,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나는, 사실은, 정말로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 엄마, 사실은 보고 싶었어. 엄마,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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