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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귀도처럼

by 오람찌


출산하고 현재 상영작이란 키워드와 거리가 멀어져 관심조차 두지 않았는데, 어린이집 덕분에 조금씩 문화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플립을 시작으로 인생은 아름다워,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델마와 루이스 등 영화관에서 재관람하고 싶었던 영화가 줄지어 개봉하는 바람에 신작을 볼 기회가 미뤄지고 있다(영화산업이 어려워 그 빈자리를 재개봉 영화가 채우고 있다고).




어떠한 계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십 대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큰 충격을 받는다.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는 겉핥기에 불과했다. 유럽 땅에서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래도 유럽은 내게 신사와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똥물을 뒤집어쓴 신사였다. 그중 하나가 홀로코스트였다.


* 홀로코스트는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로 20세기 최대의 대학살로 꼽히며, 인종 청소라는 명목으로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보통 홀로코스트 하면 유대인만 떠오르는 경우가 많은데,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공산주의자 등 약 1,100만 명을 살해한 제노사이드 사건이다(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희생에 대한 동정여론이나 배상 모두 차별받은 케이스). 대부분의 배상금은 유대인 희생자도 아닌 시오니즘 단체에 들어가 이스라엘 건국 비용으로 쓰였다.


* 한 인종 자체를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생적인 '존재 가치'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전무후무하다.(나무위키)



인생은 아름다워는 내가 처음 본 홀로코스트 영화다. 이 영화로 시작한 건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적나라한 장면 없이도 얼마나 참혹한 시대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와 달리 한편의 동화를 보는 듯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토리라 많은 이의 인생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 내가 본 인상 깊었던 홀로코스트 영화를 소개하면, 비극적인 상황에서 평생 잊지 못할 절절한 사랑을 한 두 남녀를 보여주는 리멤버, 전쟁의 참혹함을 민낯으로 보여주는 피아니스트, 폴란드의 하수구에서 일어나는 믿을 수 없는 실화 어둠속의 빛이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주인공 귀도와 도라가 사랑의 결실을 맺기까지의 과정을 유쾌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렇게 웃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빵빵 터지는 전반부다.


끔찍한 비극을 희극으로 그려낼 결심을 한 감독의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졌는데, 더욱 놀라운 점은 귀도역을 한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았다는 점이다.


거기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버지는 실제 수용소에서 3년을 살았던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전쟁이 끝나고도 오랜 시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부인의 권유로 아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어린 로베르토 베니니에게 마치 게임에 비유하듯 설명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영화에 코미디적 요소가 들어갔단 이유로 혹평을 받기도 했는데, 앞선 설명과 같이 로베르토 베니니는 홀로코스트 문제를 절대 가볍게 다룰 사람이 아니다. 실제 생존자였던 아버지가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들려줬던 것처럼, 한편의 동화처럼 거부감 없이 많은 사람에게 이 사건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전반부의 유쾌한 행복이 있었기에 후반부가 더 잔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를 재관람할수록 희극 속에 숨겨진 대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귀도: 왜 절 부르셨어요, 삼촌?

다른 웨이터도 많은데.

뭐 좋아요, 다음은 인사 연습 많이 했어요,

해볼게요. 45도 각도로 숙여요.

샴페인 병처럼요. 더 낮게 숙여도 돼요.

80에서 90도까지 180도까지도 할 수는 있겠지만...

얼마나 숙여야 돼요?


삼촌: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를 생각해.

너무 낮게 숙이면 일어서질 못해. 그럼 죽은 거지.

봉사를 하지만 절대 종은 아니야.

봉사는 당당한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야.

신도 인간에게 봉사하지만 인간의 종은 아니지.




조슈아: 왜 유대인과 개는 들어가면 안돼?


귀도: 유대인과 개를 싫어하니까.

모든 사람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어.

저기 가면 스페인 사람과 말을 못 들어오게

하는 가게가 있어. 더 멀리가면 약국이 있어.

거기에 중국인 친구가 캥거루를 데리고 갔는데,

들어가도 되냐니까 중국인과 캥거루는

안된다고 하더래. 다 주인 맘이지.


조슈아: 우리 서점엔 아무나 다 들어오잖아?


귀도: 그래, 우리도 써 붙이자. 넌 누굴 싫어하니?


조슈아: 거미, 아빠는?


귀도: 난 고트족이 싫더라.

내일부턴 써 붙이는 거야.

"거미와 고트족 출입 금지".

고트족은 정말 질색이야.



"안녕하세요, 공주님!"


도라를 처음 본 귀도가 외친 말이다. 영화 내내 자주 등장하는 대산데, 귀도는 도라를 만날 때마다 정말 공주처럼 대했고 끝내 사랑을 쟁취한다. 공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혼하고도 변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 둘, 둘은 실제 부부로 로베르토 베니니는 애처가로 유명하다.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간 귀도와 아들 조슈아. 도라는 유대인이 아니기에 수용소에 가지 않아도 됐지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태워 달라고 요구한다. 부모가 되어보니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알겠다. 죽어도 같이 죽지, 홀로 남아있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테다.


영화의 배경은 아름다운 로마에서 수용소로 옮겨가지만, 귀도의 말솜씨는 여전히 빛난다. 비참한 상황에서도 아들 조슈아를 위해 정신을 다잡고 끝까지 자신을 놓지 않는 귀도를 보면, 인생을 귀도처럼 산다면 세상 두려울 것이 있을까 싶어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조잘거리던 귀도의 말이 멈추고 찾아온 침묵은 그의 부재를 더 시리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다. 쌓여있는 시체 더미. 모두가 찬란한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초등학교 때 숙제로 신문을 스크랩해 소개했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양상은 더 많은 갈래로 복잡해져만 가고, 해결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치의 의도와 달리 홀로코스트로 인해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자는 시오니즘이 크게 지지를 받고,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금의 이스라엘을 바라보면 어떤 마음일까.


인류가 만든 최악의 죄악, 전쟁. 전쟁만으로도 끔찍한데 그 참혹한 전쟁 속에 수많은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다. 우주 속 모래알보다 못한 존재들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여기 작은 모래알 하나가 세상의 평화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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