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이 시려와
새벽에 비가 온건가. 밖은 조금 축축했다. 선큰 위 창문에 걸린 화분이 집집마다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건물 양식에 익숙하게 걸려있는 꽃들이 예쁘다며 엄마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이는 시간에 우리는 모르는 외국인 집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제 늦은 오후에 걸었던 길과는 달라 보였다. 두 짐을 들고 목적지만을 향해서 걸었던 것과 달리 가벼운 두 손으로 좌우를 보면서 걸었다. 낮은 신호등. 작은 공원들. 유치원에 가는 아이에 손을 잡은 아빠. 아빠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장난감만 쳐다보는 아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바빴다. 여행 후에도 아빠와 손을 잡은 아들이 여러 번 떠올랐다. (물론 그 아빠가 입고 있었던 옷이 내가 갖고 싶고 당시에 조금 유행했다고 믿는 바버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적절하게 낡아 있는 옷이 정말 멋있었다.)
엄마가 나를 기를 때에 나도 엄마가 잡은 손보다는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었겠지. 손을 잡고 같이 가고 있다는 것보다 다른 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에 힘을 쏟았겠지. 그런 생각까지 하고서 엄마를 봤다. 엄마는 런던에 있는 공기는 전부다 몸안에 넣으려고 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관심을 쏟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버로우 마켓의 음식과 사람들이었다.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단편적으로 편집된 것 말고 움직이는 것들이 보고 싶었다. 포털사이트에서 버로우 마켓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장이 몇 시부터 열리는지 보려는데, 런던 브리지 테러 기사가 사이트 상위에 올라가 있었다. 6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의 부상자가 생긴 사건이 일어났고 버로우 마켓은 당분간 열지 않는다는 기사였다. 마음이 우왕좌왕했다.
우리는 계획을 변경했다. 먼저 지하철을 타고 코벤트 가든으로 향하기로 했다. 빽빽한 지하철에 사람은 많았고 천장은 낮았다. 답답한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더니 신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비를 맞을까 봐 당황한 기색으로 서 있는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그냥 걸었다. 지붕이 있는 곳이나 지붕이 없는 거리나 속도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분명히 비는 오고 있는데 멈추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갔다. 우리는 비를 맞는 곳과 피하는 곳 경계에서 조금 더 고민했다. 우산을 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좀 더 기다려 볼까. 그냥 뛰어갈까.
배낭을 메고 온 나는 버켄스탁 한 개만 가져왔는데 발가락이 너무 시렸다. 따뜻한 침대에서 몸을 녹이고 싶었다. 이미 시린 발가락을 적시고 싶지 않았다. 또 바람은 불 거고 그럼 비 맞은 발가락이 더 시릴 거였으니까. "엄마 발이 너무 시려" 얼굴이 하얗게 된 내가 말했고 엄마는 결단을 내렸다. 이러지 말고 안전하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자. 우리는 걸어서 코벤트 가든의 애플 스토어 입구 아케이드 쪽으로 갔다. 한산한 거리와는 다르게 애플스토어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애플 스토어 앞으로 코벤트 가든이 있었다.
비가 와서였는지 영국 상황 때문이었는지 어쩌면 이른 시간에 방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장은 애플 스토어와 다르게 한산했다. 쉑쉑 버거 파는 곳도 사람이 많다는 후기를 봤는데 때를 잘못 찾아온 탓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상점들은 반도 열지 않은 것 같았고 생기가 돌지 않았다. 유리천장의 아케이드를 천천히 걸었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소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 갖고 싶은 마그넷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는 두 개씩 마그넷을 묶어서 팔았다. 한 개는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것은 별로 였다. 그렇지만 이미 지쳐 있었고 다른 마그넷 아저씨를 만날 기력이 없었다. 엄마와 나는 이 정도로 코벤트 가든은 마무리하기로 합의를 했다. 다음은 영국박물관 일정이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클래식 연주가 들렸다. 젊은 음악가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연주가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음악소리 주변에 서서 연주를 경청했다. 지쳐 있던 것이 풀어졌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새로운 문화에 기쁜 것이었는지 감미로운 음악에 감사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다음 일정을 유지하려면 힘을 비축해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처음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다행히 다시 회복될 수 있을 정도로만 지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