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 아워 전에 집에 가기 위해 얼른 버스를 타고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살아났다. 이제는 눈으로 엄마를 찾지 않았다. 그림을 보는데 몰두했다. 가까운 곳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서로를 찾기도 했지만 각자 맞는 속도로 그림을 봤다. 보고 싶었던 렘브란트 자화상 앞에 섰다. 내셔널 갤러리는 영국박물관보다는 한산했다. 호황이었던 그림 시장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슬픈 시간도 함께 받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자화상을 그렸다. 왜 이 사람이 보고 싶었을까.
아침부터 걷고 지하철을 타고 비를 맞고 박물관에 다녀와서 미술관까지 여러 감정 기복을 느끼면서 변경한 계획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중에 트라팔가 광장은 머릿속에 없었다. 가깝게 위치한 건 알았지만 내셔널 갤러리 바로 문 앞에 펼쳐져 있을 줄은 생각하지 않았다.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여기 와서 앉아서 바람을 느껴도 되고 사람들을 구경해도 되고 영국을 한눈에 담아도 된다고 누가 귀에다 말하는 것 같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 뭐야. 좋은데" 내가 말했다. 학구열이 높은 엄마는 당장 여기가 어딘지 검색했고 나는 내셔널 갤러리 계단을 내려가서 분수 쪽에 앉았다. 멀리서부터 두 팔을 들고 엄마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방향을 바꿔서 찍으면서 도시를 찍고 영국 하늘을 찍었다. 넬슨 제독의 기념비를 찍는 엄마를 물끄러미 봤다.
물 옆에 앉아 있느니 바람이 느껴지고 발이 시렸다. 배가 고프다고 느꼈다. 그래도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좀 더 앉아 있었다. 우리는 천진하게 다리를 흔들면서 여유를 즐겼다. 배가 더 고파지고 러시 아워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빅벤이 있었지만 우린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입에 맞지 않는 영국 음식은 먹고 싶지 않았고 화가 날 것 같이 배가 고팠다.
따로 기록하지 않아도 기억이 생생한 날이 있다. 꾸물거리는 날씨에도 사람들은 나와서 이야기했고 비둘기가 그 사이를 걸어 다녔던 그 날을 기억한다. 계획에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
발에 치이는 게 이층 버슨데 한 번 타봐야겠다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이층 버스를 디 뮤지엄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해더윅 스튜디오가 디자인한 새로운 이층 버스가 전시물에 속해 있었다. 공공버스 디자인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국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타본 이층 버스는 놀랍기보다는 편안했다. 이층에서 보는 런던 풍경이 생경했다.
계단이 많고 추운 숙소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따듯한 물은 콸콸콸 나왔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햇반과 고추장을 먹고 싶었다. (여행에서 한식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허기가 질 때가 있다.) 튜브로 된 고추장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우리는 고추장 냄새가 여기 사람들에게 피해야 될까 잠깐 고민했었다. 그러나 밥과 고추장이라니 어서 먹고 치우는데 동의했다. 호텔의 전기포트가 감사했고 그렇게 호사스러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