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딸린 집으로 이사를 갑니다.
9월에 양평으로 이사를 간다. 이런 말을 하면 모두가 묻는다. 왜?라고.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은 "출퇴근은?"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을 돈을 벌기 위한 투자처로 볼 것인가? 삶의 방식을 실현시켜 주는 요소 중 하나로 볼 것인가? 어떤 삶을 살아보고 싶었는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고 싶은가? 다양한 질문을 몇 년에 걸쳐 스스로에게 했고, 숙고 끝에 내린 답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집이었다.
사실 머리로 생각해 내린 답은 아니다. 모든 일은 우연처럼 자연스럽게 왔다. 아마도 작년이었던 것 같다. 잠자리에 들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일상과 일, 삶의 습관 모두 나의 가치관에 맞게 통합되어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 뒤 그 마음은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잊힌 적이 없었다. 아마도 '의도'라는 것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인된 의도에 맞춰 변화는 서서히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주 우연한 기회에 정원이 딸린 양평 전셋집을 발견했다. 이 집이 그냥 나에게로 왔다.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나에게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서 설렘인지 모를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인 것 같은 느낌, 영혼이 끌어당기는 기분. '막상 가면 고생스러울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불편할 것이다.' 다양한 우려의 말속에서도 내면이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나는 나에게 가장 진솔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선물할 의무가 있기에.
천국을 만들 것인가? 지옥을 만들 것인가?
이제 2주 후로 다가온 이사를 앞두고 정원 관리 기술을 집주인에게서 배우고 있다. 마음씨 좋은 주인분은 내가 살기 편하게 4개월간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관리가 편한 정원으로 만들어주고 계신다.
할머니와 함께 잔디밭에 난 잡초를 뽑고 내년에 더 활짝 필 장미를 위해 가지치기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땅을 만지고 나무를 만진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이 꽃은 어떤 꽃이고, 이 나무는 어떤 나무이고 봄이 오면 어떻게 되는지 듣고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고 있다.
잔디는 8월부터는 성장을 서서히 멈춘다고 했다. 입추가 지나면 자라는 속도가 느려지고 9월 말쯤 가을이 되면 이제 잔디 깎는 일도 거의 필요 없다고. 그렇게 겨울까지 쉬고 내년 4월이 되면 다시 생장하는 자연을 위해 정원사는 일해야 한다고 한다.
햇빛과 바람, 계절의 속도에 맞춰 자라는 나무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땀을 흘리며 오전에 일을 하고 앉을 때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땀 흘려 일하는 즐거움, 노동의 기쁨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일이 끝날 때 집주인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런 게 시골일입니다. 귀찮게 생각하면 한 없이 괴롭고 귀찮은 게 이 일이고, 즐겁게 생각하면 한 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게 또 이 일입니다."
나는 그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삶의 모든 일이 그렇다. 자연이 지겹다 생각하면 매일같이 자라나는 풀이 원수 같을 것이고 자연의 신비함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만끽한다면 자연은 매일 같이 배움을 줄 것이다.
모든 일을 지옥처럼 볼 것이냐 천국처럼 볼 것이냐는 나에게 달린 일이다. 삶을 가르는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양평 집은 불편하겠지만 나는 그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기로 했다. 편하자고 시골로 오는 것도, 정원이 큰 집에 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자연 속에 살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찾고 땅을 배우고 싶어 왔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필름이 바뀌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이틀간 나무와 땅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살면서 잊고 살던 작은 지혜들을 얻는다. 산천초목은 사계절을 나지만 성장이 멈추는 시점도 있다. 자연은 쉼이 없을 것 같지만 쉬는 때를 분명하게 갖는다.
앞으로 더 배우는 게 많을 것이다. 가지고 있던 편견, 고정관념이 양평의 생활 방식에 따라 깨지고 달라질 것이다. 또 식물은 어떻게 자라는지 땅은 어떻게 기운을 유지하는지 사람은 자연 속에 살면서 무엇을 변화해갈 수 있는지 배우게 되겠지.
기대되는 양평기(楊平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