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일상을 산다
허름한 옷의 맨발의 비렁뱅이가 들꽃을 보고 울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우주를 모른다.
날마다 사람들을 만난다. 온라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든 직접적으로 만나든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누구는 깊이 인연을 맺기도 하고, 누군가는 오늘 만났는지도 서로 모른 채 지나간다.
그 가운데 나는 사랑과 삶에 대해 노래하는 시인을 만났을 수도 있고, 위대한 철학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 한 사람의 세계는 내가 모르는 우주다. 지루한 직업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내면에 반짝이는 우주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항상 같은 길을 도는 버스 노선처럼 고루하기만 한 일상 속에 어떤 이는 광활한 우주를 품고 있을 것이다. 작게 부서지는 햇살에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시인의 얼굴을 가졌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없는 하루를 마치고 책 한 권을 읽으며 무수한 감성에 젖어 내 우주를 만들어 나가듯이. 그럴 때마다 한 개인이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내 안에 쌓아오는 우주를 그 어떤 말로, 누구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결국 인간은 타자와 온전한 소통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오늘 우주를 생각했다. 홀로 앉아 나와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 모든 것이 극도로 섬세하고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우주와 내가 다르지 않고 자연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생각했다. 동물과 나 또한 다르지 않고 그 속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님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다르지 않기에 내가 아무것도 아님에 감사할 수 있음을 생각했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했고 태어나 죽어가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생명을 잇는다는 것의 의미도 생각했다. 먹는다는 것의 의미와 내 행위에 대한 결과를 생각했다.
나의 생각은 펼쳐지고 막히고 지나가고 돌아간다. 때로는 저 사막으로 달려가고 때로는 고향집에 닿고, 우물에도, 강에도 바다에도 닿는다. 그런 나의 우주를 나는 보일 방법을 모른다. 직장인 이 아무개의 이름으로 가두지 못한다.
허름한 옷의 맨발의 비렁뱅이가 들꽃을 보고 울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우주를 모른다. 냄새나고 해어진 옷을 입은 비렁뱅이로 간단하게 정의 지어질 수 없다.
당신의 내면은 보이는 것보다 가치 있을 수 있다. 그 안에 패터슨에게 주어진 빈 공책처럼 수많은 가능성들로 채워져 있을지 모른다. 무엇이 된다는 가능성이 아닌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들이.
그렇게 유영하는 사유들만이 삶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쓰고 있는 껍질은 그 모든 것을 내보일 수도 없기에.
2019년 8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