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은밀한 동행자
경기도민의 삶은 보통 1시간 이상의 출퇴근 거리와 함께한다. (더 짧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다.)
처음 경기도로 이사를 했을 때 주위 지인들의 걱정이 많았다. 집과 회사 거리가 너무 멀다, 올림픽대로는 항상 막힌다, 출퇴근이 힘들 텐데 괜찮겠느냐까지. 자고로 집이란 회사 근처에 얻어야 하는 법이며 ‘근접성’은 집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그들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마음은 없다.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주의 모든 것에 음과 양이 존재하듯이 모든 것에는 장단이 존재하는 법! 아무리 최악의 경우라도 찾아보면 좋은 점이 있기 마련이다.
길다면 길 수도 있는 출퇴근 시간은 책 읽기 딱 좋은 시간이다. 지하철로만 1시간 거리, 거기에 서울에서 먼 시골 경기도에 살기 때문에 보통은 앉아서 갈 수 있다. 지하철로 다닐 때는 e북이 나의 동반자이다. 경기도민은 들고 다니는 가방의 무게가 삶의 무게다. 가벼울수록 좋다. 종이책을 좋아하지만 무게를 덜기 위해 핸드폰으로 책을 읽는다.
작년 여름부터는 새벽 수영을 가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차를 직접 운전해서 다닌다. 차로 운전을 할 때는 오디오북이 새벽 출퇴근 여행길의 동행자다. 덕분에 1시간의 출퇴근은 하루 중 가장 차분하고 평온한 시간이 되었다.
처음부터 오디오북에 익숙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전문적인 성우가 녹음한 - 보다 본격적이라고 해야 할까 - 정규 상품 같은 오디오북을 들었지만 책의 종류가 한정적이라 지금은 그냥 읽고 싶은 책을 e북으로 구매하고 AI 성우가 읽어주는 오디오북을 듣는다.
전문적인(?) 오디오북은 발음부터 음조의 높낮이까지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반면에 AI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발음이 어색하다. 하지만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듯이 깊이 있는 책의 내용과 사유가 읽어주는 사람의 전문성을 뛰어넘는 순간이 온다.
오디오북을 고를 때에도 나름 기준이 있다. 매일 새벽 4시 반에 차에 오르기 때문에 새벽시간에는 마음에 차분함과 평온함을 줄 수 있는 책을 고른다. 하루를 시작할 때 기분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심란해질 수 있는 추리 소설 등과 같은 류는 제외한다.
또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힘든 난해하고 복잡한 류의 전문 서적도 제외한다. 그럼에도 듣고 싶은 과학 서적이 있다면 그 경우에는 수영을 마치고 남는 시간 동안 다시 e북으로 읽으며 사유하는 시간을 갖는 편이다.
그렇게 다양한 책들과 만났다. 경기도민이 아닐 때부터 경기도민이 될 때까지 차 안에서 만난 작가는 은밀한 나만의 동행자였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카를로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마이클 싱어의 <상처받지 않는 영혼>,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순간의 나>,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의 <익스틀란으로 가는 길>, <초인수업>, 존 사노의 <통증혁명>, 바버라 블래츨리 <기회의 심리학>, 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리 스케치>까지.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이 그 길, 그 순간에 나와 함께 했다.
어떤 책은 두 번, 세 번도 들었고 어떤 책은 마지막까지 완독 하지 못했지만 책들과 함께 있는 시간들은 모두가 좋았다. 오디오북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이 마치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은 날도 있었다. 위로가 필요할 때,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찰 때, 절망할 때, 그리고 기쁠 때에도 그 순간에 나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가 삶의 길에서 찾은 좋은 징조처럼 오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때, 내가 경기도에 살고 있다는 것도, 1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해야 한다는 사실도, 지금이 새벽 4시 반이 지나고 있다는 사실도, 어제의 피로도, 지금의 슬픔도 모두 잊었다. 차 안에는 작가와 나, 그리고 새벽의 고요만이 함께 했다. 그와 그녀의 이야기에 나의 사유도 흐른다.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내면의 깊은 이야기를 빗대어 보기도 한다. 작가와 공명하는 순간, 깊은 몰입을 선사하는 그 순간이 감사하다.
세상의 수많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들이 미지의 독자를 위해 써 내려간 글이 한 사람의 영혼과 닿는 순간이다. 작가의 말이 영혼을 흔들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머리를 깨운다. 나는 더 깊게 내면으로 들어간다. 아집을 깨부수고, 에고를 잠재우고, 더 큰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더 진실하게, 더 깊게, 더 넓게.
경기도민의 오디오북이 이끄는 길은 이런 세계로의 여행이다.
** 이미지 출처: Chat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