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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에스토니아에도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스티븐킹이 끌고 간 데리에 있었네요.

by 콩작가

이번주 금요일이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간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가고 싶다. ㅋㅋ 동해안 가서 회도 한 접시 먹고 싶고 집 앞 맛있는 돼지갈비 집에서 돼지갈비도 사 먹고 싶다. 26일간의 핀란드행은 입맛을 사라지게 했다. 유럽을 가면 어디를 가나 음식이 맛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사대주의가 잠재의식에 박혀 있어서 그런 걸까? 새로운 것을 찾아먹어도 결국 파스타, 미트볼, 샐러드, 햄버거, 피자 안에서 돌고 도는 느낌이다.


핀란드에서 헬싱키에서 1-2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로 포르보도 가보고 투르쿠도 가보고 했는데 솔직히 딱히 기억 남는 것이 없었다. 북유럽은 봄, 여름에 오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뭐랄까.. 굉장한 유물과 볼거리가 있다기보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에서 차양 달린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정취를 느끼러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투르쿠도 강변을 따라 카페들이 늘어서 있는데 여름이면 의자를 놓고 늦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고 맥주도 한잔 마시면서 즐기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다시 말하면 겨울에는..? 볼 것도 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언 강물과 흐릿한 날씨, 흩날리는 눈을 보며 산책하는 것 외에.


이번 주에는 (심심해서) 마지막 근교 여행지로 에스토니아 탈린을 갔다. 큰 기대는 없었다. 겨울의 유럽이란 거기서 거기라는, 경험에서 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여행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좀 더 많은 공부를 해서 세밀하게 음미하면 모를까, 나처럼 단순히 글이나 쓰러 와서 자투리 시간에 근처를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볼거리가 많은 것은 아니기에.


그럼에도 이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책 한 권을 꼽겠다. 근교 여행은 보통 편도로 2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때 기차 안에서, 배 안에서 읽었던 스티븐 킹의 <그것>이 참 재미있었다고나 할까.


20대까지 스토리가 주는 도파민에 심취한 나는 소설을 참 좋아했다. 그때는 인문학 책이나 에세이보다 흡입력 있는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 더 잘 읽혔다. 30대에는 번아웃이 오면서 책 한 권도 읽지 못하다가 한 5년 전부터는 소설보다는 에세이나 인문학 서적을 위주로 읽었다. 과학 서적을 포함해서. 정서를 자극하는 어떤 내용보다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책들이 좋았다. 그러다 그냥 재미있는 소설 하나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보다 다음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는 소설 말이다.


사실 번아웃이 왔었을 때 웹소설에 중독된 적이 있었다. 중독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매일 10시간 이상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주말이면 사람도 안 만나고 하루 종일 읽을 때도 있었고 심지어 회사에서 일하는 도중에도 읽은 적이 있었다. 로판이나 판타지 소설을 위주로 읽었는데 웹소설들은 특정 종류의 감정, 그것이 설렘이든 무엇이든 아주 영리하게 자극하는 면이 있었고 나는 그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정상일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웹소설을 한 달 새 백 권을 넘게 읽고 매번 탐닉하듯 새 소설을 찾고 있는 것과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서 쌓이는 피로(실제로 잠을 거의 안 자고 읽었다.)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 백 권의 책을 읽고 그 순간은 재미있었지만 무너진 일상에 남는 공허함이 있었다. 그래서 끊었다. 그 뒤 <도파미네이션>이라는 책을 읽다가 저자가 로맨스 소설에 중독적으로 빠진 자신의 이야기를 해서 내가 웹소설에 중독되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하튼 그 뒤로 스토리가 있는 책은 잘 읽지 않았는데, 유럽에 와서 처음으로 흡입력 있는 스토리가 있는 책, 소위 멱살 잡고 소설이 주는 세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책이 읽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왜 가능한지 궁금해졌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스티븐 킹의 소설이었다. 그가 글쓰기에 대해 쓴 <유혹하는 글쓰기> 책을 보고 난 후여서 스토리와 더불어 작가가 어떻게 썼을지도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전체 3권의 책인데 벌써 2권까지 다 읽고 마지막 권을 읽고 있다. 20일이 지나가는 유럽 여행에서 이 책이 더 남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정말로 그렇다. 흡입력 있는 스토리란 8시간 동안 탈린 거리를 걷는 경험보다 4시간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경험이 더 모험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날 밤 나는 결국 꿈에서 페니와이스를 만났고 무서워서 잠에서 깨기까지 했다. 읽으면서는 전혀 무섭지도 않았는데 (솔직히 마흔이 넘어 읽는 공포 소설이란 다 거짓이라는 것을 다 알고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꿈에서 페니와이스가 나오게 만드는 힘은 작가가 그야말로 내 멱살을 잡고 그 세계로 나를 불러들였기 때문 아니겠는가.


한 줄 읽으면 끝까지 읽게 되는 글. 글이란 것은 자신의 세계에 독자를 초대하는 일이고, 마법적인 공명을 일으키는 일이다. 그 글에 독자는 초대되는지도 모르게 초대되고 작가가 상상하는 세계를 진짜처럼 영위한다. 작가가 만든 도시를 배회하고 악당을 만나고 주인공을 친구로 삼으며. 어떻게 봐도 정말 멋진 일이고 멋진 직업이다.


에스토니아를 여행하면서 결국 책과 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었다. 여행기를 기대하고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혹여나 있다면 (나는 내 글을 누군가 끝까지 읽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못 믿겠다.)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하지만 때로 무엇을 경험하느냐보다 무엇을 느꼈느냐가 더 기억에 남는 법 아니겠는가. 이날 눈으로 하얗게 물들었던 에스토니아도, 옛 모습을 잊지 않았던 탈린의 오래된 시가지의 정취도 좋았지만 페니와이스가 있는 데리의 세상으로 나를 끌고 간 스티븐 킹의 스토리가 더 생생한 경험을 제공했으니 말이다.


탈린의 구시가지 Vanalinn 작은 프라하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중세 도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함.
광장에 커다란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오전 10시 정도라 아직은 어둡고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트리는 예뻤다.
트리 장식이 내 머리만 (실제로는 머리보단 작았지만) 했다. 트리 뒤로 보이는 옛 모습의 건축물들.
파트쿨리 전망대에서 본 탈린의 시가지. 옛 동유럽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예뻤다. 엽서에 나오는 도시 같았다.
재래시장에 가서 점심으로 먹은 햄버거. 으... 한국 가서 갈비탕이나 한 그릇 하고 싶다..ㅠㅠ 이젠 햄버거 쳐다도 보기 싫달까. (만만해서 자주 시켜 먹었더니.. 사진만 봐도 느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 그래도 낮이 되니 하늘이 파랗다.
이름은 모르겠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 주변에 보이길래 가서 찍었다. 엽서에 나온 그림 같은 모습.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의 앞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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