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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핀란드처럼 고요해지기

끌어당김보다는 내맡김

by 콩작가

스웨덴에서 돌아오니 핀란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 해 첫날부터 시작된 눈은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여기는 눈이 온다.


헬싱키는 눈이 내리면 더 핀란드다워 진다. 거리에도, 지붕 위에도, 나무 가지에도 하얀색 눈이 소복이 쌓이고 거리에는 제설차가 다니는 풍경이 겨울 나라 같다.


늦은 아침 해가 뜨자 눈발이 거센데도 단단히 무장하고 집을 나섰다. 3일부터 한식당이 문을 연다는 소식에 김치찌개를 먹으려고 나왔다.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니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서 연말부터 1월 2일까지 쉰다는 팻말을 눈여겨봤다가 3일이 되자마자 그날 하루의 목표를 김치찌개를 먹는 것으로 삼았다

.

버스에서 내려 10분 동안 걸었다. 단 10분인데도, 모자며 어깨에 눈이 쌓여 눈사람이 됐다. 식당에 도착해서 ‘탁탁탁’ 옷에 쌓인 눈을 털고 따뜻한 식당에 들어가 비빔밥과 김치찌개를 시켰다.


식당에는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을 리메이크한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음 울 적 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꽃 향기에 취해도 보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러 본다. 노래를 따라 마음도 떠난다. 서울의 대학로 거리를 걷고 향기로운 꽃 향기도 맡으며. 오늘 하루 김치찌개나 먹는다는 사소한 목표도 기분이 좋고, 이렇게 손쉽게 이루는 것도 기분이 좋다. 이렇게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저런 공상을 하고 있으니 밥이 나왔다. 거의 한 달 만에 먹는 김치찌개는 온몸을 데워주고 그간의 여독을 다 풀어 줄 만큼 맛있었다. ‘하.. 이런 게 한국맛이지.’ 나도 모르게 식당에 앉아 있는 외국인들을 쓱 쳐다본다. 이 맛을 알고나 있느냐는 듯이.


흰밥에 김치찌개를 야무지게 말아먹고 나오니 여전히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핫초코지.’


하루의 두 번째 계획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트램을 타고 해안가에 작게 지어진 레가타(Regatta) 카페를 향했다.


핫초코 두 잔을 시키고 밖으로 나와 얼어있는 바다를 앞에 두고 핫초코 위에 올려진 휘핑크림을 젓고 후후 불어 달콤한 핫초코 한 모금을 머금는다. 따뜻하고 달짝지근한 핫 초콜릿이 목을 타고 흐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눈을 떠서 하고 싶은 일 한 두 가지를 하고 나머지는 흘러가는 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얼어붙은 바다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생각이 다시 이어진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끌어당김보다는 내맡김이 아닐까? 진짜 내 길이라면 열릴 것이고 내 안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둔다면 타고난 재능이 있는 곳에 열정은 생길 것이며 그 방법도 열리지 않을까? 내가 애를 쓰지 않아도, 걱정과 불안으로 안달하지 않아도 말이다.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이 실패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일들은 연결되고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을 테니까.


매일 내 삶에서 가장 하고 싶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내맡긴다면, ‘내 의지대로 가는 길’과 ‘나의 개입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벌어질 일’ 사이에서 전쟁을 벌이느라 쓰이는 에너지가 해방되어 진짜 나의 운명이 나에게 다가올지 누가 아는가? (‘내 의지대로 가는 길’과 ‘나의 개입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벌어질 일’의 표현은 마이클 A. 싱어 작가의 <될 일은 된다> 책을 인용했다.)


인간이 지금 현재 모습을 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두 ‘우연적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데 말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게으른 나에 대한 질책,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잠잠해지자 눈 오는 핀란드처럼 가슴이 고요해졌다. 그러자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다 잘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더욱 생생히 올라왔다.


분명 다 괜찮을 것이다. 내 작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나를 더 성장시키고 내가 꼭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줄 것이었다.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날 것이고 필요한 것은 필요한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IMG_4335 2.HEIC 1월 1일 크루즈가 도착한 날 핀란드는 눈이 오고 있었다. 눈 내리는 수오멜린나 섬.
IMG_4348 2.HEIC 눈이 와도 아이들은 놀고 강아지는 산책을 한다. 각자 다 제 할 일을 한다.
IMG_4354 2.HEIC 비빔밥과 김치찌개. 오랜만에 먹으니 더 맛있다.
IMG_4362 2.heic 카페 앞 전경. 바다가 얼었고 그 위에 눈이 쌓였다. 고요하다.
IMG_4377 2.heic 잠깐 방문한 투르쿠도 눈이 왔다. 강물도 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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