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처럼 잘난 딸을 원하지 않았다!"
엄마와 심하게 다투던 날, 엄마가 내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날 처음, 엄마 인생에서 내가 어떤 딸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됐다.
우리는 언제나 동상이몽을 꿨다.
어릴 적 엄마는 내가 부엌일 하는 걸 유난히 싫어했다. 남편 밥상, 시부모 밥상, 돌아가신 분들의 제삿밥상까지—그놈의 밥상만 차리며 젊은 시절을 다 보낸 엄마는,
“너는 이런 거 하지 마라. 밥 짓는 것만 배우면 평생 밥만 짓고 산다.”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그래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키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이 말하는 ‘복 있는 여자’의 전형적인 인생을 살다 가길 바랐다.
“조상님들, 제발 우리 딸이 착하고 멍청한 놈 하나 잡아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소.”
명절마다 성묘를 가면,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 묘 앞에서 이렇게 빌었다. ‘왜 하필 착하고 멍청해야 하냐’고 물으면, 내 성격을 감당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기가 막혀 늘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엄마의 꿈은 내게 열등감이 되었다. 엄마가 그리던 삶은 ‘잘 사는 여자’의 인생이 어떤 것인지, 어린 내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으로 새겨졌다. 나는 그와는 정반대로 살아왔고, 엄마의 바람은 매번 내 안에 헛헛함을 남겼다.
동시에 나는 엄마의 걱정거리였다. 선생님이 되길 바라며 교대나 사대를 가라고 했지만 경영학과를 택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선생님이 안 될 거면 공무원이라도 되라’고 했지만, 공무원 시험조차 보지 않았다. 그래도 결혼은 할 줄 알았겠지만, 마흔이 넘도록 여전히 혼자다.
엄마는 호통도 쳐보고, 달래도 봤지만 헛수고였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듯, 자식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대로 응원해주지 않는 엄마가 서운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결국 내 인생에 가장 큰 용기를 준 사람도 엄마였다. 엄마는 집안이 어려우니 절대 서울로는 대학을 못 보낸다고 했지만, 합격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니가 잘났으니까 그렇게 살지. 못난 년이면 그렇게 산다냐!”
엄마는 늘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세상에 대고 호통을 쳤다.
어쩌면 엄마가 내게 원하는 삶은 걱정 없이 사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온전한 여자의 삶’을 살라고 말했지만, 숨은 뜻은 ‘생존의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단란한 가정 안에서 내 사람들과 안전하게 살아가는 삶’을 바랐던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엄마 스스로가 꿈꾸던 삶이었을 것이다. 고단했던 인생길의 고비마다 그런 평온을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망은 고스란히 나에게 전이되었다.
엄마는 내가 더 평온하게 살 줄 알았던 것 같다.똑똑하게 키웠으니, 세상살이에 이리저리 흔들릴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늘 위태롭고, 고집스럽게 저 좋을 대로만 살았다. 그런 딸을 향한 복잡한 마음은, 끝내 말로 나오지 못했다.
그저 ‘잘난 딸 년’이라고, 한탄을 하듯 속삭이는 것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