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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윤 Mar 13. 2023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이나 적어봅니다.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반차를 쓰고 싶었다. 친구와의 약속은 5시라 어쩌면 잠시 일찍 나간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는데 그냥 반차를 쓰고 싶었다. 주말에 글을 쓰고 싶었는데 토요일에는 명상 수업을 7시간 정도 하느라 못썼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명상을 7시간을 한 줄 안다. 모두가 오해하지만 뭐부터 정정해줘야 할지 몰라서 그냥 둔다. 명상을 설명해 달라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명상이라는 것을 실천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몸에 대해 알아야 할 지식이 있다. 누군가는 경험과 지식을 통해, 직관을 통해 알지만 보통은 우리는 모른다. 감정이란 무엇이고, 알아차림이란 무엇인지, 우리의 뇌는 어떻게 구조되어 있는지 이런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야 한다. 그래야지만 무엇을 위해, 명상을 왜 하는지에 대한 의도가 생기니까.


각설하고 아무튼 토요일에 이런 일로 바빴고, 일요일은 하루를 쉬었다. 토요일에 종아리 근육 파열이 와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고맙게도 아침에 일어나니 전날보다 종아리 근육이 가뿐한 기분이다. 내 몸은 참 회복력도 좋다. 주섬주섬 겨울이불을 챙기고 밀린 빨래를 챙겨 코인 세탁방에 갔다.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즐거움이란. 하루가 즐겁고 행복하다.


나는 세탁하는 시간이 참 좋다. 덤으로 주어진 것 같아서다. 세탁기를 돌리는 동안 나는 빨래를 한다는 목적을 이루고 있지만 정작 내가 할 일은 없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마치 유능한 부하직원을 하나 둔 기분이다. 해야 할 것들은 있지만 이 녀석을 시키면 완벽히 해낼 것을 안다. 고맙게도 나에게 질문도 없고 내가 뭘 알려줘야 할 것도 없다. 내가 할 일은 그냥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덤인가. 남는 시간, 자투리 시간 등등 뭐라고 말해도 좋다. 손해 보는 것 하나도 없다. 언제나 플러스다. 그 시간에 나는 고요히 하고 싶은 걸 한다. 일요일에는 책을 읽었다.


빨래를 마치고는 더 글로리를 정주행 했다. 금요일 명상시간에 사람들이 하도 더 글로리, 더 글로리 하고 집에서도 가족들이 봐서 TV를 보지도 않는 명상 선생님도 강제로 봤다고 한다. 괜스레 그 광경이 귀여워서 미소 지으며 더 글로리를 보기 시작했다. 김은숙 작가는 참 대단하다. 같은 복수극인데 대사에 서정성이 녹아 있다. 문동은이 엄마에 대해 첫 번째 가해자인 걸 잊을 뻔했다는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전전두엽이 아예 사라진 것 같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그 첫 번째 가해자는 엄마다. 그래, 우리 시대에는 그런 얼굴의 부모도 있는 법이다. 가족이 잔인한 것은 함부로 ‘천륜’, 하늘의 이름을 인연에 붙여버린 것이다. 모든 부모가 훌륭하지만은 않고 세상에서 부모가 가장 위험할 수도 있지만 끊어내기가 힘들다. 누군가에게 구원은 그 가족에게서 빼내주는 것인데도.


더 글로리를 마치고는 감사 일기를 썼다. 요새 주말에 배우는 명상 수업 덕에 감사함을 진하게 연습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건대 감사함을 잘 떠올리는 편인 것 같다. 명상을 하며 스스로의 강점이라고 해야 하나, 나 자신의 강함을 마음 깊이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감사함이다. 내 삶을 잘 반추해 보는 편인 데다 그렇게 반추했을 때 오는 마음 깊은 감사함을 잘 떠올렸다. 최근의 감사함이 무엇이었냐 묻는다면, 삶의 무한한 지혜와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모든 것에는 명암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의 감사함을 떠올렸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ㅎㅎ 한 줄 요약이란 이렇게 어렵다.


그저 힘들고 긴 터널일 것만 같았던 모든 일들도 지나고, 나는 그 과정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회피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돌아온 지혜는 너무도 귀중한 것이라는 이해가 있었다. 상처는 극복될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은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지만 그 신비를 엿볼 수 있는 지성을 가졌으며, 상처를 극복해 보면서 오는 자신감은 누구도 뺏을 수 없고 뺏기지 않을 나만의 금강석,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알았다. 삶에서 겪는 부정적인 감정, 생각, 일의 모든 이면에는 밝음, 지혜, 행복을 위한 열쇠가 숨겨져 있으며 나는 그것을 성실히 살피겠노라 하는 명상의 목적을 얻었다. 그래서 두려움을 향해 의도를 세웠다.


‘두려움아, 너를 이해하고 싶다. 너의 지혜를 알고 싶다. 좋은 친구가 되자.’


나에게는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으로 인해 언제나 주저하는 일들도 있다. 그것이 사람을 향할 때도 있고, 일을 향할 때도 있다. 두려움은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동시에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너무 많은 이해를 준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 두려움은 사실인가? 진솔한 마음으로 두려움에게 질문을 하면 답을 줄거라 생각한다.


20대에 대인 기피증이 있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나의 뿌리 깊은 두려움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날 홈스테이를 운영하는 집주인의 친구가 놀러 왔다. 그때 나는 4인 가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고, 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외국인 친구는 나를 포함해 3명이었다. 우리는 모두 식탁에 앉아 있는데 그 친구분이 나에 대해 영어로 밑도 끝도 없이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게 미래형이었고, 말하는 모든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너는 여기서 일을 하게 될 거야. 하지만 계속 있지는 않아. 몇 년 후에 훌륭한 마천루가 보이는 도시로 이동하게 될 거야.”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하숙집 아줌마가 친구가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하느님께서 기프트를 주셨단다. 그 재능이란 미래를 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때 그 친구분이 나에게 한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날은 같이 공부하던 러시아 유학생 친구가 LA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에게 클럽을 가자고 했다. 나는 솔직히 그때 왜 나에게도 제안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누가 봐도 나는 LA의 찐따 같았는데 말이다. 안경을 끼고 성실하게 공부나 하던 나에게도 꼭 같이 가자고 했다. 옷이 없다고 하니 자신의 옷을 빌려준다고 했다. 거의 헐벗은 옷이었는데 망설이니까 클럽에서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 말해줬다. 고민해 보겠다며 망설이고 있는데 그 하숙집 친구분이 내게 말했다.


“자신을 조금 놓아줄 필요가 있어. 조금 더 가볍게 즐기고, 클럽 같은 데 가서 자신을 좀 풀어줄 필요가 있는 사람이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믿어줘야 해. 네 친절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너는 사람들이 너를 싫어할까 봐 너무 두려워해. 그러니까 마음껏 놀다 와. 마음껏 해도 괜찮아.”


그 후로도 그때의 말이 나는 계속해서 기억에 남았다. 그 친구분은 내 무엇을 보고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그런데 나는 그 말에 울컥했다. 내 마음속 깊은 두려움을 그녀가 말해줬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할 거란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타인의 눈치를 보는 건 내 본능이다. 이 본능은 사회생활에서 나를 지키는 힘이었고, 조직에 적응하는 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유대감을 막는 장벽이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친해지고 싶은데 벽이 있다는 말을 아주 자주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슬펐다. ‘나도 원인을 몰라요. 그냥 내가 나쁜가 봐요.’


그 두려움이 몇 년 전부터 사라졌다. 두려움과 대화하면서부터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회생활에서 불쑥 강한 감정이 들면 그때에 화를 내거나 회피하거나 자동적 반응을 하고 나면 집에 와서 그 감정을 꼭 살펴봤다. 애정 어린 대화를 하면서 두려움을 마주했고, 두려움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어린 시절의 상처, 어릴 때의 기억, 학교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상처, 사회적 편견, 사회가 주는 압박감까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인기피증이라는 두려움은 나에게 내가 얼마나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역으로 알게 해 줬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모든 장벽을 벗고 한 존재에게 다가가고 싶다. 누구를 만나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두려움 없이 아껴주고 두려움 없이 상처를 받고 두려움 없이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그러니 인생의 이면과 심층에 대해 고마워할 수밖에.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인생은 초콜릿 상자라는 대사처럼 인생은 앞으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 무엇이 나와도 상관없다는 것이 인생이 주는 메시지다. 왜냐하면 무엇을 선택하든 거기에는 명암이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이 나와도 배울 수 있다. 예전에는 오글거리며 들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우리는 이 별을 여행하는 여행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경험하고, 배우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다. 그러니 어떤 역경에도 우리에게는 진심 어린 배움이 있고, 우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속에서도 빛날 수 있다고 믿는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글을 쓰고 싶었는데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몰라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더니 벌써 한 편이 써졌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참 고맙다. 잠시 꽃샘추위가 왔지만 내일이면 없어진다고 한다. 내일은 봄에 대해 만끽하겠지. 오늘은 꽃샘추위에 대해 온몸으로 만끽하면 된다.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기적이다. 우리는 아주 희귀한 확률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 우주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것은 엄청난 확률이며, 그 생명 중 삶과 우주를 사고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더 희귀한 확률이다. 그러니 숨 쉬고,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이 기적을 좀 더 깊게 감사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There are only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호기심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 영원성, 생명, 그리고 현실의 놀라운 구조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은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매일 이러한 비밀의 실타래를 한 가닥씩 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신성한 호기심을 절대로 잃지 말아라.
The important thing is not to stop questioning. Curiosity has its own reason for existing. One cannot help but be in awe when he contemplates the mysteries of eternity, of life, of the marvelous structure of reality. It is enough if one tries merely to comprehend a little of this mystery every day. Never lose a holy curiosity.

-Albert Ei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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