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이유
언젠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일어나기 싫어서 꼼지락 거리다 우연찮게 구글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는 녹음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미국에서 있을 때 비자를 받으러 잠시 한국에 들렀던 때였던 것 같다. 미국에 더 남아 일을 계속할지 한국으로 돌아올지를 고민하던 시절에 했던 사주 상담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사주 상담을 하게 되었고 친구가 녹음해서 음성파일을 메일로 보내줬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들으면서 맞아, 이런 시절도 있었지 하면서 재미있어하는데, 뜬금없이 내가 부업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물었다. 내가 이런 것도 물어봤었나? 하면서 들었다. 계속 글을 쓰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며 글을 써보면 어떤지 묻는 나.
이 부분에서 녹음 파일을 정지시켰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오래도록 글을 쓰고 싶어 했구나.. 그런데 시작도 하지 않은 이유는 뭐였을까? 글을 써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냥 써볼 걸 그랬다.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그냥 글을 꾸준히 써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원하던 일을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애초에 싹을 자른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냥 써보고 또 써보면 어떻게 될지 무엇을 알게 될지 모르는데 그 시작을 안 했다. 글을 쓴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연하게 올 것들을 상상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내면이 어떻게 변화할지, 쌓인 글들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주 황금연휴에 한라산 등반을 계획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제주도행 비행기가 결항되고, 나는 당연한 수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표도 취소했다. 그날 김포로 돌아오는 표를 취소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날 일찍 비행기 표를 예매해서 제주도로 향했고, 지금 한라산 등반 중이다.
사람일은 모른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이토록 당연하고 당연한 명제를 언제나 잊고 산다. 아무리 거창한 계획을 세워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 그 계획이 수정되고, 취소될지는 알 수 없다. 또 그렇게 변경된 계획이 무슨 일들을 가지고 오게 될지 알지 못한다.
한라산은 취소되었지만 다른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한라산행 대신 집에 남아 쓰는 이 한 편의 글이 또 다른 무엇으로 연결될지 아무도 모른다.
태어나 지금껏 내 계획대로 살아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더 넘쳐났다. 20대 후반 나의 마흔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하게 평범하게 일하고, 당연하게 결혼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혼자라면 당연하게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루지 못했던 글을 쓰며 회사를 다닌다. 나의 당연하지 않은 마흔에는, 거창한 계획보다는 우선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 한 글자라도 쓰는 것, 그토록 원해왔던 것 한 가지를 작게라도 시작하는 것. 그저 오롯한 한 숨을 내쉬고 깊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다.
나에게 남은 당연하지 않은 인생을 위해 당연하지 않은 작은 것들을 온 우주가 보내는 메시지인 것처럼 해야겠다. 그리고 그 작은 것들이 모여 무엇을 줄지 나는 모른다. 삶이 주는 거대한 파도에 온전히 내맡겨 보는 것, 내 나이 마흔에 이것을 이토록 깊이 있고 절실하게 알게 될지 나는 몰랐다.
2023년 5월 비가 내리던 아침